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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글 쓰는 시간

2021.05.10

프라하 시내의 천문시계 (2002.08.04)


2021년 5월 10일 오전 10시 25분.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새로운 문서 파일을 만든 후 타자를 치기 시작한 시간이다.


하나의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단순한 방법은 마치 달리기 경주처럼 “땅”하고 총성이 울리면서 키보드를 처음 누르는 순간부터 초고의 마지막 온점을 찍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재는 것이 아닐까.


중간에 드립 커피도 내려야 하고 친구의 문자에도 절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드립을 날려줘야 하니 그 시간의 100% 동안 타자를 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마도 가장 측정하기 쉬운 “글 쓰는데 걸린 시간”의 정의일 것이다.


숙련된 방송인에게도 생방송은 매번 두려운 일이라고 했는데, 이 글을 끝내는 시간을 기록할 것을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하니 긴장이 된다.




하지만 글을 쓰는데 정말 그만큼의 시간만 걸리는 것일까.


현재 교내 기숙사에 거주하는 모든 대학원생은 의무적으로 주 1회 코로나 19 검사를 실시해야 한다. 3월 중순부터는 검사 키트를 수령한 다음에 스스로 검체를 채취한 후 (지나치게 점잖은 표현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면봉으로 코를 과감하게 후비는 자괴감은 여전히 낯설다) 기숙사 단지 인근에 위치한 수거함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 수거함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비유와 예시는 어떻게 배열하면 좋을지 등을 생각하면서 밀봉된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튜브 안에 있는 오염된 면봉을 우체통과도 같은 묵직한 검은 박스에 투입하고 왔다. 기숙사 방에 다시 들어와서 손을 씻자마자 모니터를 다시 켜고 새로운 문서 파일을 만들었다.


수거함까지 걸어서 갔다가 오는데 10분 정도가 걸린다. 이 글의 마지막 온점을 언제 찍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10시 25분부터 걸린 시간에 적어도 10분은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늘 그렇듯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내다가 오늘 아침에 그분이 오셔서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른 것은 아니다. (이제 갓 내린 커피를 들고 왔으니 언제부터 타이핑에 속도가 붙기 시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스스로 글을 쓰면서 해설까지 하니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안드로메다로 가는 은하철도 999 급행열차를 탄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거나, 혼자서 멍을 때리다가 기록하고 싶은 무언가가 떠오르면 핸드폰에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핸드폰을 열어서 지난 메모들을 보니 지난 4월 30일 낮 12시경에 “글을 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에 대한 메모를 적으면서 당시에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비유를 입력한 기록이 있다.


그 비유는 바로 이것이다. 3분 카레가 먹고 싶은 날도 있지만, 묵은지 김치찜이 그리운 날도 있기 마련이다. (점심시간이어서 음식 비유가 떠올랐던 것 같다.) 간혹 순식간에 떠오르는 짧은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며칠 동안의 숙성을 거칠 때가 많다.


물론 모든 글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포도주를 잘못 숙성하면 식초가 된다는 비유는 식상해서 인용하기도 부끄럽지만, 오늘처럼 월요일 아침은 늘 힘들고 비유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폰에 있는 메모 목록만 봐도 아직 완성된 글로 쓰지 않은 아이디어 5-6개가 있다.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글이 도저히 써지지 않으면 메모를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한 메모에 있던 내용이 다른 글에 흡수되기도 한다.


이제 시작한 지 40분이 넘게 지났다. 그 시간에 적어도 열흘은 추가해야 “이 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에 조금은 더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4월 13일 아침, 백신 2차 접종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 반나절 동안 백신 접종을 1948년의 베를린 공수작전에 비유한 글을 썼다. 그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기억나지 않아서 위키피디아를 읽은 후에 사실상 표절을 하느라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린 것이다. 게으른 탓에 글을 전혀 다듬지 않아서 그 길이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 글을 받아보신 부모님께서 물어보셨다. “이번 글은 쓰는데 얼마나 걸렸니?” 아마도 그 시간에 연구에 조금만 더 집중하면 좋을 걸, 이라는 걱정에서 하신 질문일 것이다. 백신 접종 후 컨디션 회복이라는 핑계라도 있었기에 죄책감이 조금은 덜 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글도 한시라도 빨리 마무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을 글로 조금씩 풀어내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은 좋지만, 본분을 망각하고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베를린 공수작전에 대해서 언제 처음 배웠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의 유럽 역사 수업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 재밌게 읽었던 <먼 나라 이웃나라>에 등장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글에 인용한 다른 예시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최근에 어떤 기사에서 들은 소식도 있고, 아주 어릴 때 들었던 무언가가 무의식 가운데에서 튀어나오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 편의 글에 등장하는 내용과 감상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기 마련이다.


이제는 1시간이 넘게 지났다. 4월 13일에 들은 부모님의 질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최종적으로 기록된 시간에 최소한 27일은 추가해야 할 듯싶다.




이제는 종착역에 거의 도달한 은하철도 999 급행열차에 앉아서 생각해본다.


예시를 배울 기회가 없으면 글에 인용할 수 없듯, 인생의 경험에서 누적된 추억과 감정과 소소한 깨달음들이 없다면 글로 표현할 내면의 이야기들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문구를 그동안 교보문고를 들락거리면서 수도 없이 봤지만, 책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면 글을 쓸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에 수록된 “글쓰기, 라는 것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고 허수경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는 분이었다고 썼다. 이 글의 마지막에 나는 내 할머니가 어린 나를 데리고 바닷가로 나간 기억을 불러오려고 한다. 우리는 어느 봄날 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봄빛이 아련한 그 바닷속에서는 새 바다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할머니는 바닷빛을 한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서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니 그, 바다 때깔, 보나, 니가 글을 쓸 줄 알게 되몬 그 때깔 이바구 먼저 써다고.’”




현재 시각 11시 55분. 아직도 남은 몇 개의 문장을 쓰려면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리겠지만, 문서를 처음 만든 후에 1시간 반이 지났다. 물론 앞으로 오탈자와 비문을 교정하는데 걸릴 시간도 포함되지 않지만, 좁은 의미로 생각하면 이 문단까지의 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은 약 90분이다.


하지만 과연 그 90분이 전부일까. 두 날짜 사이의 기간을 계산하는 한 웹사이트에 생일을 입력해보니 태어난 후 오늘까지 10,433일이 지났다고 한다.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벌써 10,000일이 지났을 줄은 몰랐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 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은 10,433일이다. 예전에 썼던 글들도, 앞으로 쓰게 될 글들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치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축적된 경험들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앉아서 이 글을 이런 방식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 쌓인 모든 것들이 어디로부터 찾아와서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2012년 여름, 서대문 근처의 골목에 있는 한 식당에서 먹은 감동적인 묵은지 김치찜이 떠오르는 점심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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