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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포스터

2021.05.12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벽에 아무 포스터도 없이 휑하면 괜히 사이코패스 같아서 섬뜩하더라.”


대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 한 친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길이 없듯이 친구의 이 한마디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숙사에 입주한 지 3주도 되지 않던 2016년 9월 21일에 포스터 두 개를 주문했다. (Gmail의 검색 기능은 매우 유용하면서도 무섭다.)


르네 마그리트의 “승리” (1938),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연인이 있는 정원 – 생피에르 광장” (1887). 전자는 예전에 인터넷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우연히 발견했었고, 후자는 고등학교 때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모의 유엔 행사 참가 후에 다 같이 구경을 갔던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처음 봤었다.




사실 굳이 포스터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같은 1인실에서 거의 5년을 지냈지만, 그동안 가족 외에 방에 잠시라도 들린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코로나 시국이 계속되는 요즘처럼 화상통화를 자주 하던 때도 아니니 배경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방에 있으면 책상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그림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주로 그림을 등지고 앉아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사이코패스로 오해받기 싫은 두려움”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텅 빈 벽을 간단하게라도 장식하고 싶은 마음이 약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방을 들릴지도 모르는 손님에게 허세를 부리고 싶은 욕망이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액자를 사서 그림을 반듯하게 걸 정도로 돈을 지불할 용기는 없었다. 교내 문구점에서 파는 스펀지형 테이프로 두 작품을 벽에 붙였다. 수평을 맞췄는지, 두 그림 사이의 간격이 적당한지 바로 확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물질적 허영심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오로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소비를 하는 행태를 맹렬하게 비판하며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에 매우 충실하게 2019년 2월 9일에 두 개의 포스터를 더 구매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그리고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위의 다리” (1899). 역시 이번에도 포스터의 수평과 그림들 사이의 간격을 확인해줄 사람은 없었다. 포스터의 크기도 제각각 달라서 미적으로 아름다운 최적의 배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베블런 선생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약간의 과시적 소비는 필요한 것 같다. 대학원 생활에 소소한 낙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짧게는 2년, 길게는 거의 5년 동안 바뀌지 않은 화상통화 배경을 보고 그림을 이제는 한 번 바꿔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최근에 들어왔다. 마침 이렇게라도 분위기 전환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긴 고민 없이 바로 수용했다.


지난 5월 1일 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제외한 3개의 포스터를 즉시 철거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 빈 공간을 어떤 포스터로 채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결정에는 직감을 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마르크 샤갈의 “꿈” (1939),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6)를 선택했다.


FedEx로 5월 5일에 배송이 된다는 이메일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5월 4일 오후에 교내 문구점에 들려서 포스터 접착제를 샀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늘 즐겁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윽고 어린이날이 되었다.


포스터는 도착하지 않았다.


김칫국 한 사발을 원샷하고 급체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배송 현황을 확인해보니 5월 5일 오후 4시 34분에 패키지가 오하이오의 페덱스 시설에 접수되었다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5월 5일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5월 5일에 물품이 출고된다는 공지를 잘못 읽었던 모양이다.


맙소사.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진 기다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인내심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5월 6일 밤에 확인해보니 포스터는 여전히 오하이오에 있었다. 5월 7일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포스터가 남태평양의 어떤 섬에 톰 행크스와 운이 없는 배구공 하나와 함께 분실되는 것은 아닌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5월 8일 오전 2시 18분에 일리노이의 “Countryside”라는 장소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새로운 지명(地名)을 끊임없이 생각해내야 했던 누군가의 창의력이 끝내 고갈된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5월 9일 새벽 2시 50분에 캔자스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떴다. 하루 간격으로 마치 징검다리처럼 주를 하나씩 건너뛸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같은 날 오후 2시 54분에 텍사스에 도달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전달되면서 이 가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5월 10일 오전 2시 2분에는 뉴멕시코, 그리고 오후 1시 17분에는 끝내 캘리포니아에 입성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배송 현황 페이지를 다시 새로고침 해보니 어젯밤 10시 58분에 새크라멘토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보인다.


예상 배송일은 5월 14일이라고 한다. 아직도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아직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완성되지 못한 휑한 벽을 보고 있으면 공허함이 밀려온다. 


이제 길어도 이틀이면 그 빈 공간이 채워질 것을 안다. 그 답답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잘랄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의 일부다.


“매 숨결마다 생각이 찾아온다
매일 귀한 손님처럼 그대의 가슴에

님아, 생각을 개개의 인격으로 여기라
인격은 그의 생각에 따라 저마다의 가치와 생명을 가지므로

만일 슬픈 생각이 행복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한 안배이다

그대의 집을 모조리 거칠게 휩쓰는 것은
새로운 행복이 복의 근원에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요

심장의 뿌리로부터 노란 낙엽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은
푸른 잎사귀가 돋게 하기 위함이며

낡은 즐거움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새로운 환희가 저 너머 세계에서 기뻐하며 오게 하기 위함이다.”


최첨단의 운송 네트워크를 통해서 나날이 새 정보가 갱신되는 꾸준한 업데이트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를 보름도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아마 지나친 기대일 것이다.


그렇지만 텅 빈 공간을 보면서 그 공간을 채워갈 순간들, 지금도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모든 순간들을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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