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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연금술사

2021.05.10

오늘 지금의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늘까지 한층씩 서서히 쌓여온 모든 순간들 때문이다. 기억이 나는 일도, 잊힌 일도, 유쾌하고 행복한 추억도, 슬프고 어두운 순간도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You have it in your power to merge everything you have lived through--attempts, false starts, errors, delusions, passions, your love and your hope--into your goal, with nothing left over.


신과 기독교 신앙이 중심이었던 세계를 등지고 인간과 합리적 이성을 숭상하는 계몽주의를 거쳐서 끝내 절대적 진실을 철저히 부정하고 모든 가치관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포스트모던주의를 향해 질주하는 서구 문명을 지켜보며 괴로워하던 그였다.


니체의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신이 그 중심에서 사라진 어지럽고 공허한 세상을 바라보며 그는 “위버멘쉬”를 대안으로 외쳤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you have it in your power”라는 2인칭 대명사를 거듭 쓰면서 인간의 주체성을 그토록 강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한 때 위의 구절을 떠올리면서 큰 위로를 얻었다. (원문을 읽은 것은 물론 아니고, 니체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글에서 접했던 것 같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원하던 대로 되지 않은 일들도 모두 그 의미와 목적을 결국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이 교만이었음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연금술사라고 해도 오로지 자신만의 지혜로 그동안 거쳐온 모든 순간들, 때로는 납덩이처럼 둔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조합해서 금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사람마다 인생이라는 질문 앞에서 제각기 다른 해답을 찾아 나서겠지만, 갈수록 이 구절에 더욱 의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너무 빨리 지나갈 것만 같은 즐겁고 편안한 날에도, 먹구름이 도무지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은 답답한 날에도 그렇다.


“순금”이라는 표현과는 너무 거리가 먼 내면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을 할 때도 있다. 마치 하천에서 사금 채취를 하다가 패닝 접시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미세한 금 입자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주위의 인연들에게 소중한 의미로 잠시나마 남겨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마저도 욕심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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