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침반 May 30. 2021

"나와 디탄"

기억에 남는 순간들 (2018.12.11  / 2021.04.24)

스웨덴, 비스뷔의 알메달렌 공원 (2013년 6월)


1961년,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 묻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있지만, 그중 극히 일부에만 역사적 의미가 부여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도, 오늘 저녁에 누군가가 퇴근길에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호대교 위로 한강을 건넌 것도 객관적 사실이지만, 전자에만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고 후자는 그 사람조차도 잊는 순간으로 지나간다.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들의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잊혔지만, 누구나 기억에 오래 남는, 혹은 오래 남겨진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순간들을 엮어서 이야기를 쓰고, 지나온 길의 모습을 그려보며 앞으로 갈 길을 그려본다.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에는 어떤 의미와 방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불가능하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행동하는 동시에 생각할 수는 없고, 생각하는 동시에 행동할 수는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또한 그 입자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조건을 추가하면 우리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한계는 그만큼 더 높아진다.


지금도 간직하며 살아가는 모든 기억에 의미를 부여해서 미래를 그리는 것은 어쩌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만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무엇이든지 일단 분석하고 해부하는 생각의 습관에 익숙해지면서 "그저 감상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종종 들기도 한다.


모든 경험에는 반드시 얻어갈 어떤 깨달음이나 교훈이 있다는 믿음은 오히려 자신을 옥죄는 강박이 될 수 있다. 어떤 기억을 집요하게 해부하면 언젠가는 뚜렷한 의미를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도 실은 착각일 수도 있다. 일상 속의 많은 순간에서 수도 없이 마주하는 모호하거나 밋밋한 감상을 있는 그대로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매사를 너무 깊이 생각하려는 머리를 비우고, 의미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치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색무취의 무의미함과 더 친숙하게 지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 속에 진정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고, 1인칭 시점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니.


중국의 작가 스티에셩은 "나와 디탄"에서 자주 찾던 베이징의 디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지 않은 일이 있다면, 디탄, 내가 그것을 잊었다고 오해하지 말아 다오. 나는 어떤 것도 잊지 않았고, 다만 어떤 일들은 그저 간직하기에만 적합하단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생각도 없지만 또한 잊을 수도 없으니.  모든 일들은 언어로 표현할  없고,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고, 일단 언어로 바뀌는 순간  이상 예전이랑 같지 않단다.  모든 일은 어렴풋한 따뜻함과 고독함이고, 성숙한 희망과 절망이란다.



작가의 이전글 오지만디아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