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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9. 2021

오지만디아스

2021.03.07

기자의 대스핑크스 (2002년 3월)


I met a traveller from an antique land,
Who said — “Two vast and trunkless legs of stone
Stand in the desert... Near them, on the sand,
Half sunk a shattered visage lies, whose frown,
And wrinkled lip, and sneer of cold command,
Tell that its sculptor well those passions read
Which yet survive, stamped on these lifeless things,
The hand that mocked them, and the heart that fed;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 Percy Bysshe Shelley, "Ozymandias" (1818)




중학교 문학 시간에 셸리의 "오지만디아스"를 처음 접했던 걸로 기억한다. 논픽션에 관심이 많았어서 소설이나 시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 시에 대한 첫인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고혈을 짜서 오로지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는 일에만 혈안이었던 폭군은 결국 이렇게 초라하게 무너지고 사라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어떤 통쾌함을 느꼈다. 비록 살아있는 동안에는 심판을 받지 않았더라도, 역사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그 이면에 있는 허무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스스로를 드높이려던 수천 년 전의 최고 권력자도 이토록 무참히 잊히는데, 가혹한 햇빛 아래에서 채찍을 맞으며 무거운 돌을 옮기던 그 노예들의 고통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왕의 형상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며 그들의 울부짖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근본적으로는 그 왕과 다르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처절한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오늘 그 필사적인 몸부림 가운데에서도 이 모든 것은 잊힐 것이라는 우주적인 사실 앞에 다시금 좌절한다.




누구든 잊힌다. 공룡도 그러했거니와 인간이라는 종도 언젠가는 잊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잊히는 것은 어두우며, 어둠은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잊음이라는 불길한 딱지를 지니고 이곳 지상으로 왔으나 잊음, 혹은 잊힘에 저항하는 존재도 우리가 아닌가. 공룡들은 그들의 종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으나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잊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존재보다 약하다.

 약한 존재인 나는 기록되지 않고 잊힐 폐허 도시 앞에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말대로 누가 그렇게 수없이 파괴당했던 바빌론을 다시 건설하는가.

--- 허수경,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중 "바빌론"에서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오지만디아스"를 인용하며 고대 유적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Ruins reprove us for our folly in sacrificing peace of mind for the unstable rewards of earthly power. Beholding old stones, we may feel our anxieties over our achievements--and the lack of them--slacken. What does it matter, really, if we have not succeeded in the eyes of others, if there are no monuments and processions in our honour or if no one smiled at us at a recent gathering? [...] To consider our petty status worries from the perspective of a thousand years hence is to be granted a rare, tranquilising glimpse of our own insignificance.


폐허가 된 유적지를 보면서, 혹은 어떤 장엄한 절경을 보면서 비교와 경쟁과 타인의 평가에 지친 우리의 심신을 위로할 수 있다고 드 보통은 말한다. 꿈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자신의 원대한 야망이 실은 우주라는 시공간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덧없는지 직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조금은 더 차분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마치 밤에 잠시 덮고 있다가 아침이 오면 다시 개야 하는 이불처럼 느껴진다. 날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매일 눈을 뜨면 어김없이 엄습하는 초조함 앞에서 평정심을 지킨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만 잠을 설쳐도 며칠 동안 인생에 대한 태도가 갈지자로 요동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에 대한 고상한 기대는 접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시야를 넓혀서, 약간은 시선을 바꿔서 일상 속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작은 일, 널리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언제나 더 값진 걸까.


시인 정현종은 "방문객"에서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의 일생이 오는,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말한다. 탈무드에는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마치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묻는다 (누가복음 15:4).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Auguries of Innocence"는 이렇게 시작된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눈 앞의 순간에서 영원을 찾지 않는다면, 맺어지고 이어지는 하나의 인연을 진심으로 대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사라지지 않는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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