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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02. 2021

다듬다

반짝임에 대하여 (2021.06.01 / 2019.03.29)

찬란하게 빛나던 카프리 섬의 바다 (2016.08.02)


며칠 전에 대학원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중 한 명이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그 자리에 끼고 온 반짝이는 반지를 눈치챈 후배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알고 보니 천연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인공 다이아몬드였다. 천연 다이아몬드 채굴 과정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고려해서 인공 다이아몬드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나눠줬다.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 예외 없이 현재 이공계 분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거나 머지않아 시작할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공 다이아몬드 제조 방식에 대한 질문의 행렬이 이어졌다. 고온, 고압의 환경에서 탄소 결정체가 서서히 형성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 그 결정체를 깎고 다듬는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결정체를 깎는지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고압의 워터제트, 혹은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쓸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나왔다.


홀로 인문사회계열 전공자여서 대화에 의미 있는 기여는 하지 못했다. 그저 학부 3학년 때 들은 아프리카 정치 개론 수업에서 배운 '킴벌리 프로세스'에 대한 언급만 짧게 할 수 있었다. 반군 세력 등 무장단체에 연루된 소위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각국 정부, 다이아몬드 판매 업체와 시민사회가 협력해서 2003년에 설립한 제도다. (이 제도의 맹점에 대한 문제제기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기억 때문에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먼저 킴벌리 프로세스가 연상되었는데, 이제는 인공 다이아몬드에 대한 작은 지식의 조각도 머릿속의 마인드맵에 저장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싸이월드, 페이스북, 텀블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갖 잡념을 글의 형태로 쏟아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 사춘기가 아직도 완전히 지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예전의 글을 읽어볼 때마다 격한 이불 킥을 하고 싶어 져서 대학교 때부터는 게시하고 나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공개로 전환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난잡한 활자 더미'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처음에는 주로 마음속에 쌓인 것들을 한 글자씩 덜어내기 위해서 글을 썼지만, 주변에서 가끔씩 "잘 읽었다"라는 감사한 한 마디를 건네주는 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잠시 인턴을 했었던 한 교수님은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을 보고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글쓰기를 연습하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격려를 댓글로 남겨주시기도 했다. 이런 격려와 응원 덕분에 글을 쓰고 나누면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고, 글쓰기에 조금씩 재미가 붙었다.


그래도 여전히 글을 쓸 때마다 광야에 홀로 서서 허공에 헛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물론 혹시라도 글을 읽게 될 누군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이미 어려운 글쓰기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으로 근무한 강원국 작가는 "글쓰기의 두려움을 이기는 법"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묵직한 '팩폭'을 날린다.


자기 최면을 거는 겁니다... 첫 번째, ‘남들은 내 글에 그다지 관심 없다.’ 여러분들. 결혼식장 가서 주례사 열심히 듣습니까? 주례 서시는 분이 밤새도록 그걸 써가지고 벌벌 떨면서 주례사를 해요. 아무도 안 듣는데! 실제로 여러분들, 남의 글을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그렇게 보는 분 없어요. 그러면서 자기 글은 남들이 열심히 볼 거라고 착각해요. 그리고 혼자 막 벌벌 떨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여러분, 천하의 명문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글을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렇다. 오늘도 눈을 뜨고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런던 시내에 있는 하이드 파크의 북동쪽 모서리에는 '스피커스 코너'가 있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 되면 누구나 작은 상자 위에 올라서서 지나가는 대중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19세기 중반에 사람들이 하이드 파크에 모여 정치적 논쟁을 벌이면서 이러한 전통이 시작되었고, 영국 의회가 1872년에 '공원규제법'을 통과하여 스피커스 코너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조지 오웰 등 19세기, 20세기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도 하이드 파크를 몸소 찾았다고 한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부터는 예전보다 조금은 더 긴 글을 쓰고 나누게 되었다. 본업인 연구가 잘 되지 않을 때면 <왕좌의 게임>의 명대사인 "겨울이 오고 있다"가 귓가에 울리면서 창고에 땔감을 하나씩 쌓는다는 심정으로 글을 외장하드에 하나씩 저장해두었다.


이렇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본 몇몇 친구가 브런치나 미디엄 등 글을 쓰기에 적합한 플랫폼에 글을 올려보지 않겠냐는 추천을 종종 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글이 공개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 꽤 오랫동안 주저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26일 밤, 작은 결심을 하고 브런치에 가입해서 작가 신청을 했다. 신청 후기를 검색해서 읽어보니 글재주가 특출 난 분들도 여러 번 불합격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지만, 심사를 통과했다는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 하루 만에 이메일 수신함으로 날아왔다. 마치 하이드 공원의 '스피커스 코너'처럼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인터넷의 한 구석에 올라설 수 있는 작은 상자가 주어진 것이다. 과연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직도 의아하지만, 일단 상자가 주어졌으니 그동안 저장해둔 글들을 첨삭하고 다듬어서 올리고 있는 중이다.


로그인한 후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백지부터 새로 쓴 글은 이 글이 두 번째다. 어젯밤에 산책을 하다가 쓴 "분산"이 첫 번째였다. 그 외에는 모두 예전에 써서 저장했던 글을 가공해서 올린 것이다.




글을 올릴 때마다 매번 그 글을 처음 완성했던 날짜를 부제목에 함께 적어서 올리고 있다. 가능하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기록해서 지나간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습관 때문이다.


지금까지 올린 몇몇 글에는 날짜 두 개를 부제목으로 달았다. 글을 골라서 맞춤법을 검사하고, 단어를 수정하고, 내용을 다듬다 보니 비교적 최근에 비슷한 주제로 쓴 다른 글이 떠오른 경우다. (생각의 폭과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주제가 자주 겹친다.) 그럴 때는 두 편의 글을 접붙여서 하나의 글로 재가공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 친구들과 함께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나눈 대화를 생각하다가 2019년 3월 29일에 '깎아냄'이라는 주제로 쓴 글이 문득 떠올라서 외장하드를 열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학교 시절, 잠시 수학 학원에 다녔을 때의 일이다. 새 단원을 시작하기 전에 예전 단원의 시험지를 돌려받던 순간이 기억난다. 매번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조용히 건네주시던 반으로 접힌 시험지 위에는 빨간색 크레용으로 그려진 동그라미와 선만 있었다.

동그라미 속에서 자신감을 얻기보다는, 비처럼 내리는 붉은 대각선을 보며 밝히 드러난 무지함과 교만함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특히 도형을 다루는 단원마다 처참하게 무너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연장선 OP'를 그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상을 만들기 전에 알맞은 돌을 고르는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무 돌이나 골라서 자신이 구상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특정한 돌 속에 이미 숨겨져 있는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작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넘어지면서 얼마나 더 깎여야 하는 건지, 불편하고 부끄러운 자책의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 건지 낙심하고 지치는 순간이 있다. 스스로 허물어버린 자존감을 어디서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지 막막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깎이고 무너지는 모든 과정은 사실 불필요하고 불완전한 모든 것이 조금씩 걷혀나가는 과정은 아닐까. 잠시 아프고 힘든 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주저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글을 다듬는 과정에는 끝이 없다. 내면의 감상을 더욱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고 박완서 작가는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다"라고 했다. <알쓸신잡>에서 이 말을 전한 김영하 작가의 입을 빌리자면, 어떤 대상의 이름을 알아야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하게 된다. 글을 쓰는 것은 비단 사물에만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아니라, 내면의 모호한 생각과 감정에도 이름을 붙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다이아몬드가 빛나려면 매우 정밀한 가공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깎이는 각도가 조금이라도 빗나가거나 불순물이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으면 덜 반짝이게 되고, 이는 가공된 다이아몬드의 최종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숙련된 전문가에게도 천연 다이아몬드와 인공 다이아몬드를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일단 원석(原石)을 깎는 과정이 끝나면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고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해야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구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보통 그 결정(結晶) 구조가 인공 다이아몬드만큼 완벽하지 않다고 한다. 육안으로 보면 둘 다 화려하게 반짝이지만, 그 내면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천연 다이아몬드에는 어긋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트 흄은 <기호(嗜好)의 표준에 관하여>(1757)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주장이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반짝이는지 알 방법이 없다. 완벽하고 흠이 없어 보이는 인공 다이아몬드 앞에서 주눅이 들 수도 있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가공의 과정을 수없이 견뎌낼 뿐이다. 때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던 부분이 깎여나가는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글을 첨삭하는 과정도, 우리가 각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다듬어지는 모든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곧 끝마칠 이 글이 독자에게, 그리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알 길이 없다.


반짝이는 천연 다이아몬드를 소중히 여기듯, 일그러진 모습 속에서 순간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머물러주는 모든 인연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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