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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30. 2021

Improv

2021.04.22

Crystal Springs 저수지 옆 산책로 (2021.04.03)


초안은 언제나 엉망이다.


0에서 1로 가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키보드를 두들기는 요란한 소리가 나다가 끝내 마지막 마침표가 찍히는 것은 아무리 자주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타인의 평가를 받게 될 글이면 더욱 그렇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글이라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 도대체 어떤 찌꺼기가 자리 잡고 있는지 굳이 끄집어내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릿속이 얼마나 공허한지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적인 글도, 업무 상의 글도 모두 마찬가지다.


초안을 마친 후에는 더욱 피곤한 첨삭의 과정이 시작된다. 지뢰처럼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는 비문과 오타 사이를 헤매다 보면 카페인에 대한 의존도와 자괴감만 쌓여간다. 기승전결은 차치하고 고르디우스의 매듭 마냥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과 감정의 타래들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과감하게 칼을 들이댄 알렉산더 대왕이 매우 현명해 보인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삶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다. 글은 언제든 수정하고 끊임없이 다듬을 수 있지만, 오늘 하루는 지나가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여유가 되는 날에는 저녁에 하루를 되돌아보며 어떤 부분을 다듬을지 살펴보기도 한다. 바람직하지 못했던 어떤 행동을, 또는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비정하거나 무례한 말들을 곱씹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애석하게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Whose line is it anyway?”라는 미국의 한 프로그램이 있다. 소위 “Improv”로 불리는 즉흥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개그 프로그램이다. 사전에 대본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진행자가 출연진에게 어떤 설정을 알려주면 그 자리에서 콩트를 바로 풀어나간다.


유튜브에 있는 클립들을 보다가 밤을 새울 뻔한 적도 있다. 출연자의 위트 있는 대사를 듣고 있으면 그 촌철살인의 한 마디에 웃으며 호흡곤란이 오다가도 그 순발력에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Improv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지금은 CBS에서 데이비드 레터맨의 후계자로 간판 저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스티븐 콜베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즉흥 코미디로 처음 무대에 섰던 연예인은 의외로 많다.




마치 Improv 배우들처럼 우리는 모두 주어진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생각해내야만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초안은 언제나 엉망이기에 누구나 실수를 남발하기 마련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대에 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매일 무대에 꿋꿋하게 올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으며 숨어있는 것보다 다른 이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어울리는 삶이 훨씬 풍요롭고 보람차다.


정교하게 짜인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깊은 감동을 주지만, 서로 호흡을 맞추며 생기 넘치는 악상을 만들어 나가는 즉흥 재즈 연주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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