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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03. 2021

Lijphart

2019.05.16 / 2018.10.09 / 2021.01.07

캘트레인 캘리포니아 애비뉴 역의 승강장.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2019.05.14)


최근 우연한 계기로 아렌드 레이프하트(Arend Lijphart) UCSD 명예교수님을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에서 뵙게 되었다.


'정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요한 스키테 (Johan Skytte) 상을 1997년에 수상하셨고, 한국어로도 출간된 <민주주의의 유형>의 저자이시다. 비교정치학 개론 수업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이 인용될 만큼 민주주의 선거제도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셨다.


특히 인종 혹은 종교로 분열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성(plurality)보다는 비례성(proportionality)이 높은 제도를 채택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질문에도 시종일관 친절하게 답해주시고, 대화가 끝나갈 무렵에 앞선 질문에 충분히 설명을 못한 논점이 있다며 먼저 말씀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본인의 주장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전달하셨고, 반대되는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셨다.


비록 더 이상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시지는 않지만,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이메일과 자문 요청에 성심껏 답해주시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과학자의 역할과 학자에게 부여된 책임을 생각해본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그대를 들여다볼 것이다.” 니체의 경고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직시하고 밝게 비춰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은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등잔 밑이 어둡다는 현실만 분명해진다.


특히 개인의 예측 불가능한 특성이 아닌 구조적인 원인을 강조하는 이론에 의존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 시대에,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자신도 결국 전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어차피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관찰과 분석은 불가능하다. 나라면 불을 환하게 비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교만함의 무게는 갈수록 무겁게 다가온다.


그 동시에 드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다른 학자의 연구를 비판하고, 가장 세련된 방법론을 습득해서 논문을 작성하는 이 모든 행위가 결국에는 불치병을 더욱 정교하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거창한 명분도, 그 어떤 호기심도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현실이랑 격리되어야 세상을 더욱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논리로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마치 <트루먼 쇼>와 같이 비현실적인 캠퍼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무책임한 방관자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인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연구할 기회가 주어진 사람들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가.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 어떤 현상을 탐구하고, 그 현상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실증적 분석으로 지식을 창출하고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분명히 가치가 있다. 사회과학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분야다. 특히 정치학에서 다루는 많은 질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개인, 집단, 국가 사이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 배제, 억압과 폭력. 사실 눈 앞의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정치학이 다룰 문제는 더욱 많아진다. 정치학을 공부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는 매일 다양한 형태로 개개인의 일상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로 인해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그 현상을 이해하는 이론적 기초와 개념, 그리고 다양한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이 바로 학자에게 부여된 책임이 아닐까. 강단에서, 저서와 언론 인터뷰에서, 그리고 연구실과 교실 밖의 다양한 인연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두가 미래를 바라볼 때, 누군가는 지금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멈춰 서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앞만 보고 질주하면 자칫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묻던 한 친구의 물음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은퇴 후에도 그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시는 레이프하트 교수님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묻는다. 그동안 “나중에 뭐가 하고 싶니”라는 질문에 “교수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것은 아닐까. 경험이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대학원을 온 후에 학부 수업 조교를 하면서 학자와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은 더 깊이 살펴보게 된다.


“믿는 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믿게 된다"라는 사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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