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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07. 2021

잠기기

2021.06.06 / 2020.01.04

알랭 드 보통의 존재 (2019.07.04)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고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팟캐스트를 즐겨 듣고 있다.


그중에도 코난 오브라이언의 팟캐스트를 자주 듣는 편이다. 최근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출연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담소를 나눴다. 오브라이언은 오바마의 회고록 <약속의 땅>을 언급하며 역대 대통령 중 링컨, 테디 루스벨트 등 "글재주가 있는 대통령을 특별히 존경한다"라고 말한다.


글쓰기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오바마는 "저는 독서를 하면서 글쓰기를 배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인상 깊은 문체를 접할 때마다 그 저자의 문체를 모방하면서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오브라이언이 "그럼 어떤 작가의 영향이 컸나요"라고 묻자 오바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와 제임스 볼드윈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이 대화를 듣고 문득 궁금해져서 비슷한 목록을 작성해봤다. 따라 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문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들은 누구였던가. 바로 떠오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알랭 드 보통

박보균 (중앙일보 기자)

이석원 (언니네 이발관)

박완서

허수경

무라카미 하루키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베르 카뮈


보다시피 그 목록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보낸 지난 5년 동안 많은 양의 글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읽은 글의 대부분은 사회과학 분야의 논문이었다. 이 때문인지 특히 영어로 글을 쓸 때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글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냉장고에 무슨 재료가 있는지에 따라 가능한 요리의 폭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논문 외에는 주로 신문 사설과 기사로만 가득 채운 언어의 냉장고를 보면서 조금은 더 다양한 재료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다룬 워크샵에 참석한 적이 있다.


화제가 되는 주제에 대한 논문이라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는 것이 보통 가장 큰 문제다. 전문 용어를 최대한 줄인 명료한 문체로 작성한 논문을 간결하게 요약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한 분이 남긴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하루 종일 논문만 보다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그 논문들의 주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소설을 잠시 읽고 오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머리가 학술적 언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문체에 잠시라도 푹 잠겨 있어야 나중에 자신이 글을 쓸 때도 읽기 편안하고 부드러운 문체로 쓸 수 있다고 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해결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잠겨' 있어야 한다던 그 비유가 기억에 남는다. 비단 전문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하루를 보내면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말도 영향을 받게 된다.


여러 사람을 만나도 나누는 대화의 주제와 분위기가 늘 비슷하고, 생각들이 어떤 웅덩이에 계속 고여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한 번쯤은 살펴볼 일이다. 요즘 무엇에 잠겨서 지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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