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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10. 2021

시카고

2019.09.16

2019년 9월 9일, 시카고의 아침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재앙이 찾아온 지금, 한때 아름다웠던 이 도시의 시민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30년 동안의 축적물을 바라보며 시카고는 다시 일어설 것임을 굳게 다짐합니다.


1871년 10월, 세워진지 30년밖에 되지 않았던 신도시인 시카고의 시내를 집어삼킨 대화재 이후에 <시카고 트리뷴>에 실린 사설의 일부다.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도심을 재건하기 위해서 수많은 건축가가 속속 모여들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시카고 강가의 풍경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경관 중 하나로 꼽힌다.


시카고의 도심은 하나의 뮤지컬 무대이며, 강가를 따라 지어진 건물들은 모두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이라고 했던 한 수상 투어 가이드의 비유가 기억에 남는다. 시카고 보드 오브 트레이드 빌딩에서 볼 수 있는 1920-30년대의 아르 데코 양식, "Less is more"이라고 선언했던 건축가 미스 판 데어 로에로 대표되는 근대 건축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오대호 지역의 지형을 형상화한 현대 건축물인 아쿠아 타워를 보면 마치 한 폭의 화려한 무대를 보는 것만 같다.


대화재로 인해서 약 30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수많은 이들이 가정과 재산을 잃은 채로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되었다.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할 때 닥친 이 원인불명의 재앙이 뼈아픈 비극이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이 오직 아픈 역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운 이유다.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시카고의 도심은 여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름한 폐허가 된 도심을 다시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건축가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지 않았다면 시카고 강가의 풍경은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참사였지만, 일찍 겪은 상처 때문에 더욱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화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도심의 풍경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강가를 수놓는 건물만큼 대화재도 시카고 도심 풍경의 일부인 듯 싶다.


시카고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결국 예상할 수 없는 극적인 반전에 모든 기대를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눈 앞에 보이는 일상의 착잡한 현실과 익숙한 줄거리를 벗어나야만 진정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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