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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09. 2021

집으로

2021.06.08

이삭 정 감독의 <미나리> 중 한 장면 (2020)


이민 1세대. 처음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 개척자.


1.5세대. 아주 어리지는 않은 나이에 부모를 따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생소한 문화 가운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 탐험가.


2세대. 이미 태어나보니 부모의 고향이 아닌 곳에서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피는 하나의 꽃.


이렇듯 숫자로서 이민의 경험을 흔히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누구든 고향을 떠난 사람이라면 자신은 그 어디쯤 속하는가, 묻게 된다. 하지만 1차원 상의 [1, 2]라는 닫힌 구간은 다양한 이민의 경험을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


우리의 고향은,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어릴 때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절반은 북한 사람이야"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모두 해방 정국과 6.25의 혼란 속에서 고향인 평안남도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정착하셨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 손자, 손녀는 모두 미국과 캐나다에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유학을 했거나 지금 살아가고 있다. 그 일가(一家)의 모습 속에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여러 갈래로 얽힌 한미 양국의 역사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국문학과 교수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성(姓)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그 구체적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연안 진씨 종중회장인 단국대 국문학과 진동혁 교수(55)는 자신의 조상은 원래 안동 김씨이므로 4백여 명의 연안 진씨를 모두 김씨 성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진교수가 「안동김씨 문헌록」 「시중공실록」 등 사료를 고증에 밝힌 바에 따르면 본래 진 교수의 조상은 고려 충열왕 때의 좌시중(좌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6대조 김학.

김학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황제가 의관 정제한 자신을 남만ㆍ서융 등 거의 벌거벗은 오랑캐족과 동렬의 좌석에 앉게 하자 『우리는 소중화로서 의관문물이 중국에 버금가는데 어찌 이런 자리에서 앉힐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원제에게 상석에 앉혀줄 것을 요구했다. 격노한 원 황제가 『당장 목을 베라』고 지시했으나 신하들은 목을 벨 경우 고려의 사신들이 오지 않을 것을 우려, 환국시켜 충렬왕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충렬왕은 김학의 기개를 높이 사 원나라에는 처형한 것처럼 소문을 낸 뒤 김학의 성을 바꿔 숨어 살도록 했다.「김」자의 맨아랫쪽 「일」획을 위쪽의 「인」획에 더하고 「이」를 덧붙여 「진」씨로 사성, 강원도 삼척으로 보낸 것이다. 삼척에서 4대를 산 김학의 후손들은 그 뒤 원에 발각될 것을 우려, 다시 이주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황해도 연안으로 옮겨가 연안 진씨가 됐다는 것.

--- [중앙일보] "연안 진씨는 본래 안동 김씨...성 되찾아주오" (1990.10.07)


그렇다면 '참된' 뿌리는 어디일까. 황해도 연안일까, 강원도 삼척일까, 아니면 김학이 원나라로 가기 위해서 첫 발걸음을 뗀 개성 근처의 어딘가일까. 인류학자 페이샤오통(费孝通)은 1947년의 저서 <향토중국>에서 "중국의 전통 사회는 땅으로부터 출발한다"라고 주장한다. 중국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많은 이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뿌리를 떠나는 고전적이고도 수없이 되풀이된 이 행태는,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행태만은 아니다. 떠나온 쪽을 향하여 계속 눈길을 돌리는 것도 또한 고전적인 행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이 겪어내는 당대성을 같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주자 가운데 하나인 이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당대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꽃빛일까, 그 꽃빛 아래 어찔해서 말을 잊고 한 생애의 오후를 정지시키는 그 마음일까.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떤 대륙도 주인을 가지지 않았는데, 누구도 어떤 한 뼘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데...

--- 허수경,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중 "그러나, 뿌리를 위하여"




미국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영국에서 지낸 2년 반의 시간을 제외하면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만 18살이 되기 직전에 미국에 도착해서 뉴저지에서 4년, 워싱턴 DC에서 2년, 이제는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베이 지역에서 5년을 지냈다. 아직도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고, 가족과 친척은 대부분 한국에 머물고 있다.


출생지는 보스턴이지만, "고향"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개포동, 도곡동 일대가 먼저 떠오른다.


이민 1세대, 1.5세대, 2세대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면 순간 헷갈려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영어 이름을 쓰지만 한국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여전히 한국에 계시니 1.25세대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제는 폐지된 <개그 콘서트>와 나영석 PD 때의 <1박 2일>을 그리워하지만, 그 동시에 존 스튜어트의 <데일리 쇼>와 빈스 길리건이 연출한 <브레이킹 배드>를 즐겨 봤다.


한국, 미국 두 나라에 깊은 관심이 있지만 어느 한 나라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2016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한국의 친구들은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을 보면서, 미국의 친구들은 촛불시위가 확산되는 한국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니"라고 물었을 때 꽤나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한국어를 쓰거나 영어를 할 수도 있지만, "1 + 1 = 0"이라는 실로 놀라운 소위 "byelingual"의 민망하고 어설픈 현실을 매일같이 체험한다.


시민으로서의 법적 의무와 권리는 온전히 미국에 속해 있지만,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명쾌하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답을 주기는 어려운  같다.




에픽하이의 "빈차"에서 혁오는 "home is far away"라고 노래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갈 길이 먼데 빈차가 없네
비가 올 것 같은데
처진 어깨엔 오늘의 무게
잠시 내려놓고 싶어
Home is far away


이 노래를 들으면서 떠오른 미국의 속담이 있다. "Home is where the heart is."


우리의 집은, 가장 견고한 뿌리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바로 그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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