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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16. 2021

114D

학부 수업 조교를 하며 (2019.01.19)

2020.07.06


이미 꿰고 있는 내용을 철저히 준비해도 막상 학생들 앞에 서면 긴장이 된다. 조금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내용을 허술하게 준비했다가 “이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가,” 혹은 “이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했는가”라는 생각보다는 바짝 긴장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50분이 지나간 경험이 적지 않다.


학부 때도 그랬지만, 한두 시간씩 쉬지 않고 강의를 하면서 명쾌한 설명과 생생한 표현으로 학생 수십 명을 휘어잡았다가도 여유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적절히 깨트리는 교수들을 보면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 누군가는 몇 시간의 거듭된 고민 끝에 글로 겨우 할 수 있는 표현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통찰력 있는 문장을 그 자리에서 바로 말로 하는 내공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학생이나 청중으로 강의를 듣고 있으면 상상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에, 어떤 깨달음에서 오는 소소한 기쁨에 온전히 빠질 수 있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고 나니 하지 않던 고민들을 해야만 한다. 수많은 내용 중에서 어떻게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인가. 그 내용을 어떻게 해야 가장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성장 배경, 학문적 관심사, 선호하는 학습 방식 등 어느 하나도 같지 않은 10명 이상의 학생의 입장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물론 강의 계획서에 명시된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 특히 대학 교육에 서비스업의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학기 첫 강의 때 “이 수업에서는 이런 내용을 이렇게 공부할 것입니다”라고 소개하고, 교수와 조교에게는 그 계획을 학기 동안 충실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학기 초를 'shopping period'라고 부르는 것도, 학기를 마친 후에 강의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받는 학생을 제외하면, 학생을 일종의 고객으로 보는 것도 엄청난 억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수강료에 대한 대가로 '지식'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측면이 교수와 조교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2019년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교육은 결국 교사와 학생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수업 계획, 과제 제출 기한, 기말고사 기출문제와 같은 기계적인 요소에만 함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사가 수직적인 위치에서 권위를 앞세우고 '지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학생에게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 함께 고민하고 탐구해보자”라는 태도로 몸소 보여주는 것이 교사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아닐지 감히 생각해본다.


작년 가을 학기의 마지막 수업에서 10분 동안 끝을 모르는 오지랖으로 “나는 세상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강의 내용을 너희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정신없는 기말 기간이지만, 너희도 세상을 이렇게 보면 어떻겠니”라는 취지로 얄팍한 감상을 학생들에게 강요했었다.


기억이 미화된 탓이 크겠지만, 그 10분 동안은 교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비례대표 제도와 승자독식 제도의 차이,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을 설명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는 없었으니 그 10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이미 잊었을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역사는 이전 세대보다 그다음 세대가 한 발짝 더 나아가야 진보하고, 결국에는 학생들이 교사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야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이 여정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말, 비록 가식으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하려고 했던 말이 누군가의 기억에 희미하게라도 남았으면 하는 욕심은 여전히 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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