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안아준 작은 우주인
점심쯤이었다.
채아가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입에 넣고 씹고 있을 때였다.
나는 소파 한쪽으로 몸을 깊게 밀어 넣었다.
등은 이미 등받이에 붙어 있었는데, 더 기대고 싶어
자꾸만 뒤로, 뒤로 밀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입에서 말이 하나 툭 튀어나왔다.
“엄마 오늘 좀 슬퍼.”
누구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설명할 힘도 없었고, 위로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집 공기한테
조용히 쪽지 하나 던진 기분이었다.
그날도 겉으로 보면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장난감 치우고, 다시 꺼내 주고,
낮잠 재우고, 그 사이에 대충 뭘 좀 먹고,
깨어나면 또 웃어주고, 안아주고.
육아일기 한 줄로 적으면 ‘무난한 하루’였다.
그런데 내 머릿속 자막은 전혀 달랐다.
돈, 어른들의 말, 책임, 내일…
아이 앞에서 꺼내기 싫은 단어들만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됐다.
몸은 채아 옆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먼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외로웠다.
채아가 태어난 뒤부터
나는 스스로를 ‘북극성’이라고 부르곤 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우주인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적어도 이 집 하늘 어딘가에는
항상 같은 자리에 빛나는 별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바닥에서 놀던 채아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장난감을 쥔 손이 허공에서 잠깐 흔들리다가 멈추고,
작은 고개가 느리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눈이 내 눈과 한 번 마주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뒤뚱뒤뚱 내 쪽으로 기어 왔다.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만 있었다.
‘설마, 이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만 머릿속을 스치는데,
채아가 내 무릎 앞에 멈추더니
툭, 내 다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손으로 나를 꽉 쥔 것도 아니고,
얼굴을 파고든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몸무게를 살짝 얹고 가만히.
“왜? 뭐 필요해?”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둘은 그 자세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는 늘 북극성처럼 굳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나를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흔들리면 안 되고,
사소한 슬픔쯤은 금방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래서 힘들어도
“엄마 괜찮아”라는 말을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괜찮아”보다
“슬퍼”가 먼저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우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위로라는 건 말을 잘하는 사람이
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 ‘엄마’라는 두 글자 겨우 부르는 우주인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북극성’이라는 단어가
조금 흐려졌다.
나는 이 집에서 어른이고, 기준이고,
버티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 아이 앞에서는
울어도 되는 사람,
슬프다고 말해도 되는 사람,
그래도 여전히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걸
조금 알 것 같았다.
슬픔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시끄러운 어른들의 세계,
여전히 숫자와 말과 체면이
머릿속 구석구석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가운데
아주 조용한 온기가 하나 생겼다.
마치 누군가가 마음 위에
작고 따뜻한 모래주머니를 올려놓은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
채아는 금방 또 장난감을 집어 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곳으로 기어가 버렸다.
아마 이 아이는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커서 물어봐도
“내가 그랬어?” 하고 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북극성이었던 엄마가
잠깐, 아주 잠깐,
자기 별에게 기대서 위로받았던 오후를.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빛난다.
완벽하게 반짝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끔 흐려지는 북극성도
우주인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고,
조금은 믿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