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기 우주인의 첫 쇼핑 나들이

소리로 고른 하루

by 북극성

가을이 오기 전이었다.
집 안 공기는 이미 조금 지쳐 있었고,
나도 그랬다.



같은 동선, 같은 벽, 같은 장난감이 이어지는 하루.


그날 아침,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나 혼자 말고… 채아랑 같이 다른 공기 좀 마시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집이라는 우주기지에서 잠깐 궤도를 이탈해
스타필드라는 거대한 쇼핑 우주로 향했다.


“오늘은 그냥 둘이 구경만 하자.
살 건 없어, 아이쇼핑만.”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계획은 분명 그랬다.



스타필드 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공기와 사람들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동 매장들이 행성처럼 모여 있었다.
장난감 가게, 아동복 가게, 신발 가게.

유모차 안의 아기 우주인은
새로운 우주에 착륙한 탐사선처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훑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채아야, 오늘은 여기 다 너 보는 날이다.”

말하면서도
이 세상이 온전히 채아를 위한 곳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장난감 매장이었다.

알록달록한 상자들이
벽을 따라 끝없이 쌓여 있었다.


나는 장난감 하나를 집어 들어
유모차 앞에 가져갔다.


“채아야, 이거 어때?
좋으면 소리 질러봐.”



오늘의 룰은 간단했다.

소리를 지르면 구매,
조용하면 원위치.



첫 번째 장난감 앞에서
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으로 한 번 훑어본 뒤
금세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없이
장난감을 다시 자리에 돌려놨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비슷했다.

“괜찮아, 아직이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살짝 조급해졌다.


‘그래도 오늘,
네가 정말 좋아하는 걸 하나쯤 찾아보고 싶다.’



피규어 행성 앞, 아빠 품에 안긴 아기 우주인은 분홍 마차를 꼭 쥐고 첫 번째 “이거 사 주세요” 신호를 보낸다.



그러다 피규어 장난감 앞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기차를 타고 도는
피규어 상자를 채아 눈앞에 가져가 보여줬다.


그 순간,
채아의 눈동자가 딱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바로 이어서 특유의 짧은 비명이 터졌다.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그 소리.



작은 손도 앞으로 쑥 뻗었다.



매일 집에서 듣던 그 소리가
오늘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 이건 사라는 뜻이구나.’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피규어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오늘만큼은
엄마가 먼저 정하고 아이가 따라오는 날이 아니라,

우주인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내가 그 신호를 따라가는 날이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됐다.
이날 산 피규어 장난감
지금도 채아의 최애템이다.

기차가 채아 방 안을 빙글빙글 도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오늘 이 결정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떠올린다.



붉은 원피스를 쥔 채, 아기 우주인은 묻는 얼굴로 바라본다. “이건… 제가 고른 옷이 아닌데요?”



장난감 매장을 나와
이번엔 옷 가게로 향했다.

작은 옷들이 옷걸이에 매달려
새로운 궤도를 도는 위성처럼 흔들렸다.


나는 붉은 꽃무늬 원피스를 하나 골라
채아 앞에 들어 보였다.


“이건 어때?
마음에 들면 소리 질러봐.”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 같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채아는 옷을 한 번 보더니
금세 다른 곳을 바라봤다.

기분 좋을 때 내던 그 소리지름이 없으니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이건 아니구나.’


나는 조용히 원피스를 다시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조금 아쉬웠다.
내 눈에는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 취향보다

우주인의 침묵을
더 믿어보기로 한 날이었다.




매장을 몇 군데 더 돌다 보니
처음엔 비어 있던 양손에
쇼핑백이 하나둘 늘어갔다.

처음 집을 나설 때 외쳤던
“아이쇼핑만 하자”는 말은

이미 현실에서 조용히 퇴장해 있었다.



장난감, 옷, 작은 소품들.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잠깐씩 가슴이 쿡 내려앉았다.


이렇게 자주 올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설렘이 더 아팠다.



그러면서도,
피규어 기차 앞에서 소리 지르던 얼굴,
새 장난감을 쥐고 몸을 들썩이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속상함은
또 금세 힘을 잃었다.


현실과 마음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하던 하루였다.



쇼핑백은 아빠 손에 들려 있었지만, 오늘 쇼핑의 주인은 장난감을 꼭 껴안은 아기 우주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모차 아래에는 장난감 상자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우리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채아는 조금 지친 얼굴로
그래도 새로 산 장난감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매번 이렇게 해줄 순 없겠지.
그래도 가끔은,
오늘처럼 네가 먼저 고르고
우리가 따라가는 날을 만들자.’



오늘 하루는

오로지 아기 우주인을 위한 쇼핑이었지만,


장바구니를 채운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진짜 사고 싶었던 건

우주인이 좋아하는 표정들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날은 단순한 쇼핑이 아니라
우주인과의 구매 소통 연습 같은 날이었다.


소리로 “좋아”를 말하고,
침묵으로 “괜찮아, 이건 지나가”를 말하는 아이.


나는 그 작은 신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귀를 세웠다.


“채아야, 이거 어때?
좋으면 소리 질러봐.”

이 말은 사실,


“나는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라는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다.



아기 우주인의 첫 쇼핑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


언젠가 채아는

이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방 안에서

피규어 기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아마 이 날의 공기와,

유난히 눈이 반짝이던 작은 우주인의 얼굴,


그리고 처음으로 들은

또렷한 “이거 사 주세요”라는 신호를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