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 하얀 모니터
소진되는 감정을 쳐내기가 힘에 부쳤다. 불신의 지뢰가 두려웠다. 다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쓰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누군가를 알아가고 마음을 나누는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기로 했다. 관계에 대한, 존재에 대한, 나눔에 대한 고민 없이도 세상은 잘 굴러갈 테니까.
진심, 정성, 애정, 고민, 진정성.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단어들의 의미가 하루가 다르게 퇴색되어 갔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말은 즉, 숨 쉬듯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그와 관련된 일에 매몰되어 있었던 내 가치는 제로라는 의미였다.
무심한 얼굴로 귀와 입을 잃어가는 나 같은 이들을 지나쳤다.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는 자포자기적 심정,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조바심, 더는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단정. 마음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표정을 잃어갔다.
낯선 타인이 내 삶에 끼어 들 틈을 허락하지 않은 채 조각을 새기듯 글을 쓰고 읽어 나갔다. 글과 씨름하는 사이 글밭은 십여 년 전 내가 꿈꾸던 곳과는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영상, 사진, 그림, 가상현실, 체험. 로봇이 글을 쓴다는 시대에 펜과 종이만 붙들고 있어서는 앞날이 위태로울 것 같았다. 이토록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과연 글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내 글이 시간을 투자해 읽을 가치가 있을까,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 이 년을 보냈다.
출처 http://www.studioleeufan.org/main
깊은 밤,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하얀 모니터 위에 검을 글을 놓는다. 남들 말처럼 여유 있을 때 천천히 쓰자던 결심을 어디에 버려뒀는지 폭식증 환자처럼 다시 글을 쓰고, 읽고, 고치고 있다. 빛에 지친 눈이 눈물을 쏟아내는데도,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데도 글로 세상을 담아내는 일이 참을 수 없이 좋기 때문이겠지. 그만두자는 마음을 먹은 후에야, 나를 만류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딴에는 참 절박하게 써왔다는 것을.
나라면 네 책 꼭 사 볼 것 같아.
힘들 때마다 네 글 꺼내 읽어.
가슴이 울리더라.
네 편지로 열심히 살자는 의지를 다지게 돼.
네 편지 읽고 눈물이 났어.
오래전 먼 길을 떠나 파리한 얼굴로 돌아온 친구, 권태와 씨름하고 있는 친구, 육아에 지친 친구, 임신 전쟁을 치르고 있는 친구,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친구. 세월이 갈수록 더 보잘것 없어지는 나를 찾아온 친구들이 ‘작가’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내 어깨에 쉬어간다. 그 믿음에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내게 보내준 따뜻함에 답신을 해야겠다. 지금의 내가 필요로 하는 말을, 그대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어떤 형태의 글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회색 인간으로 지내다간 다 같이 질식할지도 모르겠으니 적어 내려가야겠다.
조곤조곤 친구들에게 말하듯 하얀 바탕 화면에 글을 담아보련다. 나와 같은 속도로 걷고 있거나 멈춰 선 이들에게 말을 건네 보련다. 가지치기가 필요한 시점, 내가 내게 내린, 글로 말하는 과제를 수행해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