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친구들과 함께 등산에 나서기로 했다. 차로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뿌옇게 흐려진다. 먹구름이 지난다 싶더니 이내 눈송이가 날린다. 예상에 없던 눈이다. 차를 돌릴까 하다가 눈송이에 들떠 계획대로 산에 오르기로 한다.
바람이 싸늘한 게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은데 거리는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눈과 낙엽이라니, 동행한 친구의 말대로 더없이 운치 있는 풍경이다. 가방 위에 비옷을 덮어쓰고 산을 오른다. 눈 덮인 붉은 단풍, 눈발 날리는 설산. 하얗고 빠알간 시간에 가을 속 겨울을 걷는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추억의 한 장이 또 그렇게 채색되어 간다.
산에는 함께 오르는 이들의 호흡을 하나로 엮어주는 힘이 있다. 산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각각이던 호흡이 한 소리를 낸다. 사인오각 달리기를 하듯 일행과 함께 속도를 맞춰 걷는다. 땅으로 스며드는 눈 같은 이야기가 허공을 채운다. 그 위로 하얀 입김이 서린다. 일상을 녹여낸 조곤조곤한 말이 살포시 단풍잎 위에 내려앉는다. 그 온기에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돌이켜 보니 이렇게 알고 지낸 지 이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일까. 햇수로는 이 년인데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온 것 같다.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해 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 푸코를 거쳐 아도르노에까지 이르렀으니 심리적 길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한 권, 문법책만 겨우 떼고 원서를 편 아이처럼 더디고 힘들게 철학책을 읽어나갔었다. 해독되지 않는 문장에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명징한 논리에 먹먹해지기도 하면서 딴에는 전투적으로 책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 질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게 철학책을 읽어내고 그에 맞춰 내 이야기를 풀어낼 여유도 생겼다. 좋은 벗들 덕에 혼자였다면 더디고 힘들어 포기했을지도 모를 길에서 철학이라는 믿음직한 아군을 얻었다.
다락방에 쌓인 책을 읽는 게 학창 시절의 유일한 낙이었던 친구, 더 멋스럽게 나이 들고 싶어 책을 잡은 친구, 철학이 좋아 철학을 전공한 친구, 문자가 좋아 문자로 세상을 만드는 일을 직업 삼은 나. 완벽한 타인이었던 우리는 책을 집 삼아 모여 '오늘'이라는 터전을 만들어가고 있다.
양지바른 그 터전이 우리를 설산으로 안내한다. 그러더니 희고 붉은 추억을 쥐여 준다. 우연히 만난 눈 덮인 가을 산의 여운이 깊다. 예상치 못한 우리의 만남이 가슴을 울긋불긋 물들인다. 가을 기운이 가시지 않은 겨울 초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