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하얗다

White

by Lunar G

돌이켜보니 삼사 년에 한 번씩 본 것 같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응원하며 짧게는 이 주, 길게는 한 달 동안 드문드문 만나온 게 벌써 십년이다. 대화라고 해야 지난 시간을 곱씹고 내가 모르는 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네가 모르는 내 주변인에 대한 것들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현듯 주어지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니 그런 시간을 내게 선사하는 너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내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2017년 다시, 너를 만난다. 눈물마저 마른 둘이 마주앉아 쓴 웃음을 짓는다. 가뭄 든 땅처럼 갈라진 얼굴의 사이사이 사연이 놓인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안다. 충분히 안다. 너는 너로서, 나는 나로서 살아온 세월을 세세히 늘어놓지 않아도 말이 담아내지 못한 너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애쓰지 말자.

침묵을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고,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먼 훗날의 일로 오늘을 쓰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가진 게 얼마 만인지. 이런 쉼이 필요했다. 물리적 시간이나 돈으로 마련할 수 없는, 내 지난날을 함께 공유한 누군가만이 내줄 수 없는 위안이 필요했다.

네 어깨가 헐도록, 내 가슴이 녹도록 지고 있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말없이 앉았다. 막 더위가 가신 하늘 아래서 각성의 커피가 아닌 쉼의 커피를 마시며 쓸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바라본다. 커피향이 뽀얀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 위로 포말이 겹쳐지고 우리는 말이 없다.

침묵을 곱씹으며 물거품이 이는 바다와 하얀 포말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물이 속삭인다. 인어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고. 파도가 철석거리며 인어의 사체 같은 허연 포말을 남기고 간다. 포말에서 너를 또, 나를 본다. 앞날을 위해 달려온 너와 나의 지난날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린 걸까. 정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걸까. 파도 소리는 커지는데 너는 답이 없다.


Gustave Courbet_Waves

침묵 속에서 파란색이 아닌 흰 바다를 본다. 지금 내 눈에 비친 건 푸른빛이 아니다. 언젠가 미술관에서 본 쿠르베의 그림에서 하얀 포말을 먼저 눈에 담은 것처럼 이 바다에서도 나는 흰색을 보고 있다. 아직 어떤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백지 같은 하얀색을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길을 택하든 여기가 우리의 원점이다. 이 흰 바다를 배경으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네 이야기를 적어나가면 된다.

동화에서는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고 해도 너는, 그리고 나는 바다로 돌아갔다고 하자. 아니,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가 다음 생에서는 왕자보다 더 멋진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파도가 남긴 게 빈 종이 같은 하얀 포말인 것처럼 남은 이야기는 우리가 쓰자. 내 인생은 그리고 네 인생은 우리 각자가 작가가 되어 만든 이야기로 채우자. 우리의 바다는 하얀 걸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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