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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보다는 가을을, 가을보다는 겨울을 좋아했다. 찬바람은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부추기지 않았고, 사색을 과업 삼아 사는 나 같은 이들을 쓸모없어 보이지 않게 했으니까. 고독을 더 깊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겨울이 고독을 안고 난 것 같은 내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칼바람을 참 좋아했는데. 바람이 너무 매섭다. 인생에 기대를 건 나를 내려치듯 걸음마다 넘어지고 구르고 떨어지고. 실패, 시행착오, 시련, 낙방.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전에는 달게 받아들인 것들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람이 쓸고 지나간 손바닥이, 종아리가, 가슴이 시큰거렸다. 죽을 듯 발버둥 쳐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그때, 머리 위로 시멘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던 그때, 숨을 쉬고 있는데도 죽은 것 같았던 그때. 가시덤불 같은 시간에 둘러싸여 굳어가는 나를 지켜봐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빛도, 온기도, 사람도 없는 까마득한 길. 사지가 쓰리고 숨이 차오르고 식은땀이 났다.
소리쳐야 했는데, 멈춰 서야 했는데, 돌아서야 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굳어가는 다리를 움직였다. 쉬지 않고 걷는 사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삼키며 시린 길을 다졌다. 내 몸이 온통 가시가 되어가고 있기라도 한 듯 제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쓸수록 인생은 더 꼬여갔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침묵의 공허뿐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검은 겨울 속에서 하얀 봄을 꿈꾼다. 바람이 시리지 않으면, 해가 빨리 저물지 않으면 살을 에는 이 고독이 덜해질까, 아무렇지 않아질까 하며 백지 같은 봄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바람은 여전히 차고 길은 보이지 않고 봄은 아득하다. 살아낸 시간은 길어졌는데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간다. 기도를 하듯 윤 시인의 시를 읊조린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봄이....... 하얀색이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처럼 티끌 한 점 없는 하얀색 도화지 위에 꿈을 내려놓고, 그걸 또 하늘에 띄우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알아버린 손이 굳어가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