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아까운 사람

by Lunar G

베이컨(Francis Bacon)에게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는 영혼을 포착하는 눈을 가진 화가였다. 고흐(Vincent van Gogh)는 전환점이 되어준 아티스트였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는 그를 고무시킨 예술가였다. 베이컨 이야기에 앞서 이러한 대가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을 보니 그가 재창조에 있어 독보적인 화가였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시선을 빌려 그 자신을 녹여낸 작가, 베이컨을 가장 먼저 ‘한 점의 사색’이 첫 그림으로 선택한 된 데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의 내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큰 몫을 했을 터. 부유하는 먼지 같은 존재감의 구속됨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반추하며 가로막힘, 속박, 외침에 둘러싸인 베이컨의 세상으로 들어가 본다.

Francis Bacon_Ruskin Spear_1984.jpg Francis Bacon_Ruskin Spear_1984

분할, 해체, 해리, 외침, 자살,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Michael Freud), 동성애. 베이컨에게 붙는 수식어를 추려보면 대략 이렇다. 혹자는 베이컨의 작품을 피카소의 변용이라고 하고 혹자는 기괴함의 정수라고 하며 또 다른 이는 고깃덩이라고도 한다.

내게 베이컨 작품은 깨진 유리 조각을 맨손으로 모아둔 느낌에 닿아있다. 유리이기에 투명하고, 조각났기에 파편적이고, 붉은 피가 있어 아리기도 한 것이 그의 회화다. 붉은색과 검은색을 많이 사용했으니 대비가 극명한, 붉고 검은 작가로 남아있을 법도 한데, 그의 작품 중 한 점을 꼽으려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였다. 이 그림은 고흐의 그림 <The Road to Tarascon>의 습작 이후 변한 베이컨의 새로운 색감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를 포함한 <The Road to Tarascon> 습작들을 살펴보면 베이컨의 색이 변했음은 물론, 고흐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붓터치, 구도, 빛으로써 베이컨이 고흐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he Road to Tarascon_Vincent van Gogh_1888.jpg The Road to Tarascon_Vincent van Gogh_1888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III.jpg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III_F Bacon_1957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에서 색감을 통해 소리를 내지른다면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에서 베이컨은 ‘결박된 동세’라는 아이러니한 상으로 목소리를 낸다. 이 그림을 가만 응시하고 있자면 소리가 없는데 소리가 들리고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임이 보이며 평평한데 입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위가 주어지는 어떤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억압감을 이토록 잘 표현한 또 그림이 있을까.

D Velazquez_Portrait of Pope Innocent X_1650.jpg Portrait of Pope Innocent X_D Velazquez_1650

벨라스케스가 까다롭고 성말랐다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의뢰를 받고 그린 <Portrait of Pope Innocent X>가 교황으로서의 이노첸시오의 위엄을 그려낸다면 베이컨의 작품은 고뇌하는 교황, 나아가 교황이라는 지위에 묶여있는 인간 인노첸시오를 만들어낸다. 냉철하고 도도한 시선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는 벨라스케스의 이노첸시오는 관람객을 멈칫하게 만들고 고문을 받는 듯한, 베이컨의 이노첸시오는 관람객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베이컨의 손짓을 따라 비로소 그림 안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보편적인 미(美)와는 또 다른 미(美)를 통해 베이컨은 존재에 대해, 그리고 존재함에 대해 말을 걸어온다. 찢고, 가르고, 못 박아 놓은 듯한 그림을 건네며 베이컨이 말한다.


태초부터 생은 처절하고 뼈아픈 것이었다.
무지갯빛 앞날은 상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삶 자체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당신의 자리를 응시하라. 그런 다음 생각하라.
당신의 생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당신이라는 존재를 어떤 눈으로 마주 할지를,
당신이 차지한 그 자리의 값어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를 보며 자문한다.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_Francis Bacon_1953.jpg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_Francis Bacon_1953
나는 과연 내가 있어야 할 그곳에 서 있는가,
나는 이 자리에 아까운 사람인가 이 자리가 과분한 사람인가,
나는 진정 존재로서의 제 몫을 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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