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섬을 더듬어 들어간다. 이 섬으로 몇 편의 글을 썼다. 그곳을 배경 삼아 적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는 걸 보니 내 영혼의 일부가 여전히 그 섬을 배회하고 있나 보다. 그곳을 찾았던 때, 계절은 여름을 향해가고 있었고, 나는 지금과는 또 다른 패배감에 짓눌려 있었으며, 저물어가는 청춘은 한 점의 흐릿한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섬으로 들어갔던 그 날, 지베르니를 본 따 만들었다는 연못을 지나 도착한 건물에서 모네의 작품을 만났다. 공간이 곧 작품이 되어 놓여 있는 지중미술관이었다. <The Lightning Field>로 유명한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와 21세기 빛의 예술가인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명실공히 빛의 대가로 불리는 모네((Claude Monet)와 공간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빚어내는 울림에 먹먹해진, 그날의 여운을 다시 꺼내본다.
빛에서 소리를 듣고, 소리에서 빛을 보고, 맛에서 색을 감지하고, 눈으로 차가움을 느끼는 것 같은 감각의 혼재를 공감각이라고 배운 기억이 있다. 내 속에 내재하는 그 감각이 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실재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었던지. 내가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각이 공감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감각의 겹침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 자유자재로 공감각을 다룰 줄 아는 시인들의 글귀를 듬직한 벗 삼았고 바람과 푸른 하늘과 풀 냄새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너른 들판으로 만들었다. 펜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감각을 통해 지우(知友)들을 만났다. 음에 색을 입힌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의 섬세함과 음과 색채와 형태를 엮어낸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알파벳에 색과 향, 촉감과 형체를 새긴 랭보(Arthur Rimbaud)의 작품을 접하며 혼재하는 내 감각을 참 많이도 다독였다. 펜을 든 지 십몇 년, 탁월한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나 역시 어설프게나마 감각의 겹침을 글로 남기고 있다.
지중미술관의 모네 전시관. 보랏빛 그림과 빛, 무채색 벽과 빔(空)이 빚어내는 울림을 듣고, 물의 흐름을 보고, 바람을 결을 느낀다. 나를 빙 둘러 있는, 멎은 그림에서 움직임을 본다. 언젠가 본 영화에서 느낀 오랑쥬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의 위압감과는 다른 평온함이 나를 감싸 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수련을 감아 도는 바람에 휩쓸려 미술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람 한 점 없는 전시장이 물소리와 함께 훈기를 전해온다. 평화롭고 아득한 우주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이 아련함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쉼 없이 흘러내리는, 모네의 살아있는 물길을 보며 『채근담』 속 한 구절을 곱씹는다.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구름 속 번개나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고요함을 즐기는 사람은 불 꺼진 재와 같고 마른 나무와 같다.
모름지기 멈추어있는 구름과 잔잔한 물결 같은 심중에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도를 깨친 사람의 마음이다.
고전 속 한 구절처럼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이는 속에 고요함이 있어야 물도 썩지 않는 법. 내게 혼란을 선사했던 감각의 전이 또한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감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었리라.
흔들림 없이 움직일 것,
움직임 속 멈춤의 공간을 만들어낼 것,
멈춤 속 유동을 익힐 것.
어둠이 짙어가는 밤, 빗소리를 들으며 지중미술관 속 모네의 <수련> 연작이 남긴 말을 가슴에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