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도시, 초라한 존재감

by Lunar G


면접장을 나올 때마다 생각한다. 면접관들의 의미에 대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런 종류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인 작가들 작품을 심사해 달라는 의뢰가 자주 들어오는데 자기는 그 일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 권한이 없다는 생각에서 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작품 선정의 정당성을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일에 점수를 부여하고 줄을 세우고, 그 과정을 통해 공신력을 얻고. 누구를 위한 평가인지 모를 평가가 젊음을, 꿈을 좀먹는 것은 아닌지.......


지금보다 조금 이른 12월, 버스에 지하철을 타고 이십여 분을 걸어 면접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난로가 타오르고 햇살이 쏟아지고 적당한 수분이 허공을 채우고. 면접 대기를 위해 찾은 316호 사무실은 더없이 따뜻했다. 커피 향이 기분 좋게 코를 간질이고 들어오는가 하면 정갈하게 놓인 핸드드립 도구는 묘하게 마음을 진정시켜주기도 했다. 면접자들 사이에만 싸늘한 기운이 감돌뿐, 주변은 온통 봄날 오후 같았다. 이름이 불리고 면접관들을 보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일련의 절차가 휘리릭 지나갔다.


나가도 좋습니다.


처음 보는 이들과 수백, 수천 번도 더해왔던 그 일을 , 다시는 하지 말자 했던 그 일을 또 하고야 말았다는 허탈감이 지나갔다. 고작 십 분으로 내가 가려는 그곳을, 그곳에 이른 내 위치를 규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본질을 벗어난 질문들. 쓴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던 오후, 힘의 의미를 곱씹으며 면접장을 나왔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건물에 가린 서울은 하늘을 쉬이 내놓지 않고. 거뭇한 하늘을 배경으로 빛이 들기 시작한 건물들을 보며 회색 도시에서의 삶을 넘어다 보았다. 그토록 화려해 보이던 밝음이 눈물이 되어 눈에 맺혔다. 오후 늦게 만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이 눈물을 덜어준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화려한 도시와 그 도시의 중심가에 당당히 자리 잡은 사람들. 그 위세에 어깨를 눌렸다. 너는 너, 나는 나를 고수해왔었는데 그날만큼은 세상의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춰보는 나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초라했다. 갈 곳을 잃은 내가, 뿌리내리지 못한 내가, 그러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내가. 당신들에게서 본 빛이 당신들의 특권이 아니었을 텐데, 왜 그게 태생부터 주어져 있던 것처럼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군 것인지. 나는 또 왜 거기에 주눅 들어 끈 하나를 놓아버린 것인지.

면접장에서 받은 탁월한 질문은 어떤 교육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길 수 있다. 앞날을 같이 할 사람을 뽑는 것이니만큼 신중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신중함과 무례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의를 망각하는 순간, 사람은 동물이 되고 그들이 있는 곳은 시궁창이 되기 때문이다. 갑과 을로 양분해둔 자리를 빌미로 인격을 모독하고, 불쾌한 농담을 건네고, 누군가의 인생을 멋대로 단정하는 무례를 범하는 순간 면접은 본질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그날, 내가 조지아 오키프에게서 들었던 말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반향은 그 누가 뭐래도 잘하고 있다고, 타인의 위세가 너를 짓밟을 수 없다고. 너는 너라고 하는 울림이 되어 남았다.


Radiator Building at Night_ Georgia O'Keefe_1927.jpg Radiator Building at Night_ Georgia O'Keefe_1927

연인 스티브 글리츠의 유명세에 가려 한때는 빛을 발하지 못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남긴 화려한 뉴욕 빌딩을 본다. 이 어둑하고 밝은 그림 한 점에서 또 한 마디를 읽어낸다.

도시에도 불이 꺼지는 시간은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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