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죽을 넘긴다. 목이 멘다. 씹을 것도 없는 멀건 녹두가 목에 걸리는 이유는 그 속에 세월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녹두죽은 내가 열이 오르고 목이 따끔거리고 기력이 없을 때 찾는 음식이다. 내 어미가 아픈 손주를 위해 죽지기를 자처한 것과 다르지 않게 내 어미의 어미가 나를 위해 녹두를 붙들고 뜨거운 불 앞에서 밤새 주걱을 저은 음식이 녹두죽이기 때문이다.
녹두죽은 물에 끓여 껍질을 발라낸 녹두와 불린 찹쌀을 함께 넣고 끓여 만든다. 모든 음식이 그러하겠지만 녹두죽은 불이 생명이다. 불이 강하면 쌀이 채 익지도 않아 물이 다 끓어버린다. 불이 약하면 녹두 향이 날아가 물도 죽도 아닌 게 된다. 풋내가 나지 않게, 눌은 내가 녹두 냄새를 덮어버리지 않게 젓고 또 저어야 먹음직한 죽이 완성된다. 내가 아픈 날이면 외할미는 나무 주걱을 들고 서서 호흡에 맞춰 천천히 손을 움직이곤 했다. 알갱이도 미음도 아닌 쌀알이 아픈 외손녀의 몸에 들어가 제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당신은 주걱을 젓고 또 저었다.
그렇게 외할머니가 내 온 녹두죽은 당신처럼 겉보기에는 참 볼품이 없었다. 호박죽의 고운 빛깔도 아니고 잣죽처럼 새하얗지도 않고 전복죽처럼 화려하지도 않았다. 말린 시래기와 다르지 않은 색의 밍밍하기만 한이 녹두죽은 열이 펄펄 오른 내 혀에는 어떤 해열제보다 좋은 약이었다. 쌉싸름한데 고소한 맛의 어우러짐이 몸을 구석구석 매만져주었던 것이었다. 그릇을 다 비워내고 나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겨 왔다. 그렇게 한잠을 푹 자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한솥 가득 담아온 외할미의 죽이 내게는 진정제였던 셈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죽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문득 서러워졌기 때문이었을까. 죽 숟가락을 입에 넣는데 목이 잠겨온다. 기력 회복을 위해 사 온 녹두죽이 속을 불편하게 한다.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해보니 명치에 숙주나물이 걸려있다. 내 어미가 시모를 위해 숙주나물을 만들며 한 이야기가 소화되지 않고 남아있다. 관계의 체기와 세월의 체증을 둘러쓰고 있는 숙주가 속을 답답하게 한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내 아비의 새어머니. 폐가 온전치 못하다는 진단을 받은 후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어머니는 시댁으로 반찬을 해다 날랐다. 그 편에 나는 예정된 이별을 마주하고 있는 조부모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눈물을 흘려버리면 그게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이별이 주는 알량한 감상을 내게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버려버렸다.
무심한 죽음이 눈물을 차오르게 한다. 내 아버지 가슴을 멍들게 한 사람, 내 어머니를 서럽게 한 사람, 나와 동생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한 사람. 내게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자꾸 가슴이 아려온다. 속은 시리고 죽은 뜨겁고 작별은 나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마법 수프 같은 외할머니의 녹두죽 한 그릇이면 이별의 시간을 늦출 수 있을까, 죽음의 공포를 가릴 수 있을까.
일주일. 녹두가 숙주나물이 되는 기간이다. 나물이라도 있으면 밥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던 말에 당장 숙주나물을 무치던 어머니에게서 외할머니를 본다. 감정에 앞서 인간의 도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던 외할머니는 사라지지 않았다. 외할미는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서,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허니 언젠가는 상실감을 쥐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날에도 새살이 차오를 것이다.
내일 내 어미는 청포묵을 쑬 것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시모가 후루룩 넘겨 먹을 수 있는 묵을 만들기 위해 당신의 어미처럼 주걱을 들고 불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시모를 위해 녹두죽을 쑬 것이다. 녹두와 찹쌀과 소금이 전부인 그 소박한 음식이 시어미의 속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길 바라며 약과 같은 죽을 만들어낼 것이다.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염원을 담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