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고 싶다 VS 곡해하고 싶지 않다

Black

by Lunar G

괜찮아.

발화 문장은 하나다. 단어가 마법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문장은 수신자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형상을 달리한다. 저게 정말 괜찮다는 뜻일까. 괜찮을 리 없다는 말을 둘러하는 표현은 아닐까. 그 나이를 먹고도 이 맥락을 못 읽느냐는 마음을 미소에 가려둔 것은 아닐까. 갖은 생각이 소리를 수렴한 이들의 머리를 지나간다. 괜찮다는 한 단어가 가슴에 지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순간의 대화는 각자의 머릿속에 달리 남겨진다.

괜찮다는 말의 해독이 어려워진 이유를 탐색해 본다. 나는 A에게 불편한 말을 했고 A는 괜찮다고 했다. A가 발산 지였던 내 말에 '괜찮다'라고 응대했으므로 수신자인 나는 그 말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A에게 그 말을 내뱉기까지 나는 꽤나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뱉을까 말까 하고. 거부 의사를 표시하기로 한 것은, 폐를 끼칠지도 모름에도 그 선택을 결정하고 이행하기로 한 것은 그 상황이 내게 무익하거나 유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뒤로 물려둔 나를 앞으로 꺼내 두기 위함이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으면 되는데 괜찮지가 않다. 자꾸 무엇인가를 곱씹게 된다. 입 안에서 동그란 무엇을 혀로 굴리고 있는데 그게 도무지 녹지를 않는다. 플라스틱 사탕인 까닭이다. 달지 않은, 녹지 않는 사탕은 사탕일 수 없다. 뱉으면 그만인데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는데 어쩐 일인지 사탕을 뱉지 못한다. 혀가 얼얼하고 볼이 당기는데도 고집스레 플라스틱 사탕을 머금고 '괜찮아'를 곱씹는다.

고인 침을 넘기며 생각한다. 내가 지금 머금고 있는 것이 관계라고. 나는 지금 '괜찮아'에 담긴 '괜찮지 않음'이 가져올 관계의 왜곡을 신경 쓰고 있다. '괜찮아'로 포장한 '괜찮지 않음' 또는 '서운함'에서 비롯될 발화의 파장과 그 속에 내버려진 나도 모르는 나를 본다. 그리고 내 결정으로 인해 상처 받았을 또는 그럼에도 나를 위했을 상대의 마음을 본다. 그 위에 나를 덧씌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머금고 있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나다. A는 발화를 했고 그곳에 있던 귀를 연 이들은 그 발화를 제 식대로 받아들였다. 그게 전부다.

표면 아래로 끝없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나다. 지나치게 관계의 촉수가 섬세한 내가 그 속에 있다. A의 발화가 그러했으므로. 이후 괜찮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A의 논리가 뒤집어지는 것이지 나의 논리가 왜곡되는 것은 아니다. 편치 않음, 두려움, 불편함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관계에 지나치게 기대를 걸고 모든 관계가 말끔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관념이 말을 말인 채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질문을 던져 본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관계가 어떤 역할을 했던가, 하고.

결정의 주체는 언제나 나였으며 결단과 책임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관계의 삐그덕거림에서 오는 불편함은 세월에 휘발되었었다. 기억은 왜곡되고 맥락은 달리 해석된다. 수신자와 발신자는 같은 단어를 사이에 두고 다른 강을 건너게 된다. 다른 강으로 들어섰으니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단어의 형상이 뼈가 되어 남아 있기만 할 뿐, 살은 멋대로 붙여지는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곡해당함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오해가 편견이 되어도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소리친다.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때로는 오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오해하지 않는 데 힘을 쏟으라고.

Two Old Ones Eating Soup_The Witchy Brew_Francisco Goya 1819_1823.jpg Two Old Ones Eating Soup_The Witchy Brew_Francisco Goya 1819_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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