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가린 해

by Lunar G

해가 진 것도 아닌데 땅거미가 진다. 구름 뒤에 해가 숨어버린 까닭이다. 물기 머금은 해가 비를 쏟아내고 너른 들판은 가을을 준비하고 섰다. 여름인데 가을로 들어가고 있다. 매미가 울고 풀벌레가 노래하는데 9월은 어느새 새 계졀을 불러들이고 있다. 계절의 시차. 나무 동굴을 타고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는 것 같은 덜컹거림을 느낀다. 비를 보고 앉아. 먼먼 저 먼먼 어딘가에 있는 너는 지금쯤 어디를 향해가고 있을까. 너의 시간은 어디에 멎어 있을까. 아니 너의 시간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자판기를 두드리다가 이렇듯 멍하니 하늘 한 번 땅 한 번 보게 할 수 있는 것은 비의 힘이련가 너의 힘이련가.

새 계절이 왔는데 네 아픔은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여름을 겨울처럼 보내버린 너는 아직 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너는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이는 이 계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추위를 견디고 있다. 아픔을 진 양 어깨가 퍼렇게 퍼렇게 멍들어가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오는데 심장이 차갑게 식어 오는데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없다. 투명인간이 되어 네 옆에 선 까닭이다. 너무 가까워 너무 멀어진 이 거리를, 불러도불러도 들리지 않게 된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이 공간을 사랑이라 불러도 될는지.

닳아 끊어질 것 같은 네 어깨를 보며 녹아내린 심장으로 만든 웃음 어린 눈물을 흘려보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우는 건 싫어할 테니 촉촉한 눈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비가 얼어가는 네 가슴을 녹여주기를, 이 바람이 네 손을 맞잡아 주기를, 이 계절이 구름을 물리고 해를 불러오기를. 그리하여 네 겨울이 지나가고 우리의 봄이 도래하기를. 구름은 유유히 하늘을 지나가고 어둠은 그대로 멎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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