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장을 채우고도 한 줄도 살리지 못했다.
어제의 희열이 가슴을 지진다. 혹독한 매질이다. 재능에 대한 불안과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표현에 대한 갈구까지 겹쳐지자 설움이 복받친다. 더는 무리라며 방향을 틀어보지만 다시, 글 앞이다. 또 제자리다. 예정된 패배. 매질이 강해질수록 열망은 더 짙어지는 게 글에 있어서만은 백전백패다.
퇴고를 위해 띄운 창을 띄운다. 몇 줄 못 읽어 화면을 닫고는 골난 아이처럼 씩씩거린다. 등골 오싹한 발상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도, 전하려는 바도 읽히지 않는다. 글이 주던 짜릿함마저 거짓처럼 느껴진다. 나가떨어지고 되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는데도 이 매질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 실패를 위한 도전에 의미가 있기는 한 건지, 기다리는 소식이 과연 오긴 할지. 시간이 갈수록 회의만 더해진다.
늘었다 줄기를 반복하는 모니터 위 검은 줄에 시선을 둔다. 굼뜨지만 쉼 없는 움직임이다. 줄에서 다리를 보고 몸통을 본다. 개미다. 일사불란 한 이동을 눈으로 따라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긴 여정 끝에 개미들이 다다른 곳은 꿀 앞이다. 약 하려고 받아 온 꿀단지 주변이 검게 물들어 있다.
꿀단지 속은 꿀 반 개미 반의 참상이다. 거뭇해진 꿀은 개미들의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창구가 되어있다. 검은 사체들이 보이지 않는 듯 꿀을 향한 개미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꿀 속으로 무모하게 들어간다. 단맛을 알게 된 개미들에게 절제는 없다. 그들에게 꿀은 노고의 결실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차지해야 하는 탐욕 대상일 뿐이다.
아비규환의 지옥과 다름없는 검누런 바다. 살아있는 건 움직임이라도 있는데 죽은 건 미동도 않는다. 발버둥질 치던 개미 한 마리가 이내 잠잠해진다. 탐욕의 사투를 삼킨 꿀이 태연히 죽은 개미를 뱉어낸다. 욕망의 창구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누런 바다에 잠겨간다. 슬픈 침몰이다.
무엇이 그들을 삼켰을까. 꿀 위에서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이었던 단내의 결정(結晶)을 읽는다. ‘욕’이다. 절제하면 열정이 되지만(欲) 그렇지 못하면 탐욕(慾) 일 뿐인 마음이 꿀에 새겨져 있다.
개미들의 공동묘지가 된 꿀단지에서 내 문장을 곱씹는다. 눈먼 열정은 죽은 지렁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들의 무모함과 다르지 않다. 결과를 바라는 마음(慾)은 순수함을 탁하게 만든다. 티끌 한 점 없었던 글의 속살에 검은 점이 보인다. 하고자 하는 마음 이외의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순리와 진심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탁한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린다. 컴퓨터 배경화면의 조지아 오키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은은한 색으로 그려낸 한국의 채색화 같았던 꽃 작품이나 산타페에서의 그림들과는 다른 작품이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미완성 같기도 한 그림을 보고서야 목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는다.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하고 오지 산타페로 들어가 붓을 들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모델의 유명세에 가려진 화가로서의 재능과 남편과의 불화, 붓 끝의 예술혼과 어둠 속 외로움까지. 그녀가 만난 온 무수한 개미들이 그림 <겨울 길Ⅰ> 속에서 길을 내고 있다. 시련과 배신, 아픔과 괴로움까지 작품으로 녹여낸 그녀의 사투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벽지에 들어가 작품에만 매진한 조지아 오키프에게 ‘욕’은 한뜻이었다. 모래 바람을 맞고 홀로 어둠을 대면하며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그녀가 붙들고 있었던 건 하고자 하는 마음 욕(欲)이었다. 탐내는 마음(慾)까지 하고자 하는 의지(欲)로 녹여낸 한 예술가의 시간이 캔버스 위에 길이 되어 남아있다.
조지아 오키프의 길 위로 내가 갈 길을 그려본다.
위안 같은 만족을 위해 들어선 길도, 괴로움을 잦기 위해 택한 길도 아니다. 섣부른 기대로 과거의 노력이 무의미하다 여긴 것도, 욕심 낸 겉멋 든 문장도 진심을 다해 쓰고 싶다는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행복하자고 든 펜으로 가슴만 찌르고 있을 수는 없다. 탐욕이 더해진 열정도 그것을 걷어내며 괴로움에 신음하는 것도 펜을 쥔 이로서 짊어져야 할 사명이다. 세상 어디에도 쉽고 편한 길은 없다. 현실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일수록 정도를 따르는 게 답이다. 부단히 쓰고 걷어 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사체 같던 문장들이 언젠가 작품 한 구절로 태어날 날도 만나게 될 것이다.
개미들을 걷어내고 꿀 묻은 숟가락을 입에 넣는다. 단맛의 절정이 아쉽다.
만지작거리던 뚜껑을 닫고 고인 침을 삼킨다. 눈먼 갈구는 아쉬움만 못하다. 아쉬운 눈물로 다음을 기약할지라도 단맛에 끌려 꿀 속에 뛰어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으련다. 배불리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으로 쓰려고 가져온 꿀이었다. 밤을 지새우고 괴로움에 신음하면서도 펜을 쥐던 힘 역시 풍족함이 아닌 부족함이었다.
꿀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않는다면 꿀은 독이 아닌 약이다. 남의 꿀단지에 침 흘리고 있을 게 아니다. 어설프고 부족해도 약이 될 만한 꿀을 부지런히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현혹시키는 가짜 꿀이 아닌, 사람을 살릴 일생일대의 꿀 남기기를 목표로 해야 한다.
긴 기다림과 시련이 만들어낼 쓰고도 단 약꿀에 실패와 머뭇함은 더없이 좋은 재료다. 부단함과 무던함으로 채워낸 결실의 약꿀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개미를 죽게 만드는 설탕 섞인 꿀이 아닌 누군가를 살리는 진짜 꿀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새 창을 띄워야겠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