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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래파파 Sep 11. 2019

그때의 추억

하나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하나원으로 출근을 했다. 이곳에는 북한에서 막 한국으로 탈북한 탈북민들이 3개월동안 사회적응 훈련을 받는 곳이다. 


 이곳은 국가보안시설로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시골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공기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꽤 거리가 있어서 통근버스를 타고 갔다. 청원경찰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정문을 지나 붉은 벽돌 건물을 마주하니 약간의 두려움이 찾아왔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북한에서 막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금이 필요한 경우 근처에 있는 ATM기에 가서 현금을 인출해 사용한다. 이러한 일들도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선 일이고 계좌를 개설하는 일, 카드를 사용하는 일, ATM을 사용하는 일을 모두 교육해야한다.


 언어의 문제도 심각하다. 똑같은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래서 한국어 교육도 필수다. 교육이 끝나고 사회로 나갔을 때 자립하기 위한 직업 훈련도 이루어진다. 

 



 새로운 부서에 짐을 풀고 인사를 드리고 업무 인수인계를 받았다. 이전에 했던 통일교육업무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업무였다. 나는 하나원을 퇴소한 탈북민들에게 예산을 지원해주는 업무를 맡았다. 취업을 유도하고 장기 근무를 독려하기 위해 일정 기간 일을 하면 연수에 맞게 장려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많은 제도가 그렇다시피 채워야 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하루라도 모자라면 돈을 받지 못한다.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어찌보면 냉정하다. 이러한 일들로 엄청난 민원에 시달리게 된다.




 이곳에서 근무를 하면 자주 찾아오는 것이 당직이다. 전문 사감선생님께서 계시긴 하지만 직원들도 돌아가면서 당직근무를 선다. 당직근무 때 점호를 하면서 인원파악을 한다. 어차피 나는 하나원에서 먹고자고 했기 때문에 평일 당직근무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지만, 역시 주말근무는 많은 피로를 가져다 줬다.




이 당시 업무를 하면서 많은 민원전화에 시달렸다. 아무래도 돈이 달려있으니 민원인도 날카로웠다. 나름 나는 전화를 받을 때나, 대화를 할 때 친절하게 응대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쌓이다보니 전화 자체를 퉁명스럽게 받게 되었고, 정말 날카롭게 응대를 했다. 콜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친절하게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다.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고 했다. 민원인들의 날카로운 전화를 하루에 수십통씩 받으며 똑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정작 내 일은 하나도 못하는 하루하루가 반복되니 공무원도 사람인지라 지쳐갔고, 날카로워져 갔다.




 하나원에 있을 때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관사에 살았기에 출퇴근 시간이 짧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편도 50분 정도 걸렸었는데, 여기는 5분정도 걸린다. 그것도 걸어서. 아침 8시반에 일어나서, 슬슬 준비하고 40분쯤 출발해도 45분이면 업무 시작이 가능하다. 이 때만큼 여유있는 아침시간을 가진적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원에 있을 때가 가장 시간이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고, 그래서 이 때 영어공부, 운동, 독서를 충분히 했었다. 사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또 생각해보면 장점도 많이 있었던 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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