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준 스튜디오_용산_ 최랄라 Feel Lost
벼랑 끝에 섰다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벼랑 끝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유는 그 벼랑 끝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내가 그 깊이에 빠졌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곱 살 아이가 놀이터 구름사다리에서 매달리다 바닥에 떨어지는 0.7초라는 찰나에도 내가 어떻게 될까 생각한다. 골절의 아픔을 겪고 난 후 놀이터 구름사다리는 벼랑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 벼랑 끝에서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
벼랑을 등지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벼랑을 마주하고 있는지 그 시선 차이에서 벼랑 끝의 의미가 달라진다.
스무 살에는 호기심에라도 저 벼랑 끝에 무엇이 있을까 벼랑을 마주하기도 했었다. 그 벼랑 끝이 얼마나 깊은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서른 살에는 벼랑을 등지려고 노력했다. 저 끝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타협하는 것이다.
마흔 살에는 벼랑이 선택이 된다. 등지던지 마주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루가 멀다하고 세상은 나를 그 세상에 맞추라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기 때문이다. 스물, 서른, 그리고 마흔 다 그렇다. 그리고 맞추지 못한 나는 벼랑에 서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오롯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내가 된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내가 되는 것이다.
SNS로 인해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는 요즘, 내 자아에 충실한 내가 벼랑 끝에 섰을 때, 내 시선은 어디에 있을까? 벼랑을 등진? 아니면 벼랑을 마주한?
아주 가끔은 깊은 곳에 가라앉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내려 놓고 가라 앉는 것이다.
침대에 종이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는 남자의 뒤로 구토를 하고 있는 여성. 그녀는 남성의 무엇에 질려버린 것일까. 후에 그녀는 그를 깔고 앉아버렸다. 처음에는 목을 조르는 행위인줄 몰랐다. 그보다는 구토2에서 남자의 다리 한쪽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의문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여자가 남자의 목을 조르며 이긴 것일까? 그녀는 그의 목을 졸라버린 후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까? 그녀는 지금은 괜찮을까?
함께 누워버릴 것인가, 역겨움을 느껴 맞설 것인가.
작가는 스스로 무기력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의 역겨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맞다. 필자도 가끔 무기력한 자신을 보면서 역겨움과 한숨이 섞인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다.
이제 이 상황을 풀기 위한 방법은 개인의 선택이다. 같이 누워버리거나, 더 노력하거나.
작품 속의 그녀도 그의 옆에 같이 누워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력한 그의 옆에 함께 눕지 않았다. 작품 속 어디에서도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위에서 목을 졸라버렸다.
과거의 나는 어땠는가? 무기력한 스스로에게 경멸을 느낀 적이 있던가?
아니, 아니었다. 오히려 무기력이 주는 우울감에 빠져 침대와 하나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 무기력을 특별히 문제 삼고 싶지도 않았던 때였다. 정확히는 건드릴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무력한 자신에게 경멸을 느낀다는 것. 그 경멸은 어떻게든 조금 더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감정이 아닐까. 그것 또한 나와 잘 지내고자 하는 용기이다.
목을 조른 후의 결과가 어떠하든, 행동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의 위기에 맞섰다는 것. 그 용기에 의의를 두고 싶다.
이 글을 작성해 준 조은빈양은 패션 기획 MD를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의상과 공간에 관심이 많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동물을 사랑합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공감하고 생각에 잠기는 것 그리고 그때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깊이 있는 대화를 좋아합니다. 하루 중 소소한 소중함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