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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19. 2020

푸얼차 열풍으로 인생 역전한 사람들

멍하이 라오반장과 대익 차창

윈난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북쪽으로는 만년설산을 볼 수 있는 한대부터 남쪽으로는 우림에서 야생 코끼리가 거니는 열대까지, 다양한 기후와 자연이 병존하는 곳이다. 윈난은 중국 내 행정구역 중 가장 다양한 소수민족이 사는 성(省)이다.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25개 소수민족이 윈난에 살고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 종교, 생활양식은 윈난의 문화적 다채로움을 완성하는 백미라 할 수 있다.


윈난성 최남단에 위치한 시솽반나태족자치주(西双版纳傣族自治州)는 가장 이색적인 중국이라 할 만하다. 미얀마,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열대지방인 데다 태국 민족과 같은 다이족(傣族, 태족) 집거지이기 때문이다. 시솽반나 중심지 징훙(景洪, 경홍)의 신흥 광광지구 가오좡시솽징(告庄西双景)에서는 도심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란창강(澜沧江)을 볼 수 있다. 시솽반나 지역을 끝으로 중국 국경을 넘는 순간 이 강의 이름이 메콩강으로 바뀐다. 티베트에서 발원해 윈난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 ‘동남아의 젖줄’은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통과하며 남중국해로 흘러간다. 열대식물 가로수와 공작새 문양 장식, 코끼리 조형물이 즐비한 징홍의 거리 풍경은 마치 동남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공항 벽에 줄지어 붙은 푸얼차(普洱茶, 보이차) 광고판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중국임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오좡시솽징 야시장
만팅공원


시솽반나의 모습은 푸얼차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인식도 와장창 깨트렸다. 베이징 생활과 중국 사극을 통해 차 문화를 접한 나는 무의식중에 푸얼차 역시 한족 이미지와 연결해 상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산지에 와보니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동남아와 다를 바 없는 자연과 문화 속에서 소수민족이 찻잎을 재배해 푸얼차를 생산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푸얼차 하면 일반적으로 발효된 숙차를 떠올린다. ‘푸얼차 생차’라는 말을 들으면 ‘늙은 어린이’ 같이 모순된 표현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푸얼차는 제조법이 아니라 지역명을 붙인 이름이다. 윈난성 일대에서 채취한 대엽종 찻잎을 이용해 만든 차를 통칭하는 것이다.


푸얼차 최고 산지는 시솽반나의 동쪽, 미얀마 접경 지역 멍하이다. 멍하이 면적의 5분의1 가량을 차지하는 부랑산(布朗山, 포랑산)은 중국과 미얀마 양국에 걸쳐 있는 오래된 차나무 산지다. 이곳 터주대감 부랑족은 부랑산이 중국에 속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 차를 재배해온 차업의 선조라 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찻잎 산지 라오반장(老班章, 노반장), 가장 큰 푸얼차 제조공장 멍하이 차창(勐海茶厂, 맹해차창)도 이곳에 있다. 역사, 규모, 명성, 어느 면으로 보나 진정한 의미의 푸얼차 원산지는 멍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007년 4월, 이런 멍하이의 자존심에 흠집이 생기는 일이 발생했다. 시솽반나 북쪽의 쓰마오 시(思茅市)가 지역 이름을 푸얼시로 개명한 것이다.


본래 푸얼이란 이름은 청나라 시기 지금의 시솽반나와 개명 전의 쓰마오 등 윈난 남부지역을 관할하던 행정 소재지 명칭이었다. 차마고도 주요 거점 중 하나로, 윈난에서 생산된 차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푸얼차라는 명칭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신중국 건국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면서 최근까지 쓰마오 시로 불려 왔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푸얼차 열풍이 불면서 그 명성을 이용해 산업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개명에 나선 것이다. 2007년 중국 국무원의 승인을 거쳐 쓰마오 시가 푸얼시로 바뀌면서, 푸얼현은 시(市)에 이름을 내어주고 닝얼현(宁洱哈尼族彝族自治县)이 되었다. 쓰마오라는 이름은 푸얼시 내 일개 구(区)의 명칭이 되었다.


이름이 바뀌고 나니 푸얼시에서 생산된 차가 정통 푸얼차 같고, 멍하이 등 다른 지역 푸얼차는 어쩐지 짝퉁 같아 보이게 됐다. 푸얼차를 잘 아는 차 애호가라면 이런 오해를 할 리 없지만, 어쨌든 윈난성 여러 지역이 함께 사용하던 차 이름을 푸얼시가 자기만의 고유명사처럼 만들어 버렸으니 다른 지역에선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원산지를 자부해온 멍하이로서는 푸얼시의 개명이 더욱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중국 최고의 차 산지 라오반장


11월 말의 멍하이는 으슬으슬 추웠다. 반팔 차림으로 저녁 야시장을 활보했던 징훙에서 겨우 서쪽으로 1시간 정도 왔을 뿐인데 기온차가 컸다. 시솽반나태족자치주 소속 세 지역 징훙 시, 멍페이 현, 멍하이 현 가운데 유일하게 추운 곳이 멍하이라고 한다. 아침 9시에도 중심가는 안개가 자욱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뚜이시 지인 복 사장의 경차를 타고 산으로 향했다. 10시, 해가 높아지자 운무가 하늘로 올라가 흩어지면서 서서히 풍경이 드러났다. 부랑산 가는 길에 보이는 멍훈(猛混)의 넓은 농지는 이모작이 가능한 멍하이 지역 식량기지다. 산이 많다고 들어 가난하고 굶주린 소수민족만 떠올렸는데, 한가운데 황금 평야가 있을 줄이야. 여기서 제배되는 쌀은 태국 향미와 비슷하다고 한다.


멍하이 중심가에서 부랑산으로 가는 도로 표지판(왼쪽), 산길을 1시간 이상 달리니 저 앞에 보이는 라오반장 마을(오른쪽)


12세기 다이족 왕국 맹륵(勐泐)이 건국된 이래 시솽반나 일대는 줄곧 다이족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농사짓고 살기 좋은 평지는 다이족 차지고, 다른 소수민족은 그 기세에 밀려 산으로 올라가 부락을 이루며 살았다. 오랜 세월 산간지역 살림살이는 평지와 비교할 수 없이 궁핍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푸얼차 열풍이다. 유명한 찻잎 산지가 모두 다이족 이외의 소수민족 집거촌인 이유가 여기 있다.


부랑산에서 가장 유명한 라오반장은 하니족(哈尼族) 마을이다. 푸얼차 대박이 나기 전까지는 너무나 가난한 소수민족 마을이었다. 찻잎이 안 팔려서 산 아래 마을로 가지고 나가 쌀이나 소금으로 바꿔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2006년 무렵 이곳 찻잎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라오반장은 단번에 부촌이 되었다. 시솽반나에서 처음으로 BMW를 구입한 사람이 당시 라오반장 찻잎 중계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도 매년 봄 찻잎 채취 시기가 되면 수매 업자와 전 세계 차 애호가들이 몰려들어 마을까지 들어가는 좁은 산길이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곤 한다. 라오반장 지역에는 수령이 오래된 차나무가 많다. 고차수에서 채취한 찻잎은 1킬로그램에 12,000위안 수준으로 팔리는데, 다원의 관목에서 채취한 찻잎의 12배나 되는 가격이다.


라오반장의 상전벽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마을 입구다. 타운하우스 단지처럼 고급스러운 아치형 대문이 손님을 맞는다. 아무리 봐도 산골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벼락부자가 된 후 마을 사람들은 옛 집을 헐고 현대식 주택을 짓는 것을 넘어 마을 대문까지 뜯어고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헐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며 날로 으리으리해져서, 타지인은 라오반장에 갈 때마다 달라지는 대문에 놀라게 된다고. 복사장도 벌써 세 번째 다른 문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산골마을 대문이라기엔 너무나 으리으리한 라오반장 마을 대문(왼쪽), 라오반장의 자랑거리 차왕수(오른쪽)


중국 최대 푸얼차 가공 회사 멍하이 차창


산지에서 채취된 찻잎은 차창에서 가공을 거쳐 상품으로 거듭난다. 멍하이에는 10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차창이 있다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곳이 멍하이 차창이다. ‘대익大益’이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어, 대익 차창이라고도 부른다.


멍하이 차창의 역사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차엽총공사가 파견한 전문가의 현지조사를 거쳐, 이듬해 프랑스 파리대학을 졸업한 판허쥔(范和钧)과 칭화대학을 나온 장스청(张石城)이 90여 명의 차 기술자를 이끌고 포하이(佛海, 멍하이 지역의 옛 이름)에 와 차창을 건설했다. 멍하이 차창은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국가의 관리 하에 들어가는데,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 2004년 국영기업 민영화 조치에 따라 소유권이 민간에 넘어갔다. 이때 차창을 인수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대익그룹 회장 우웬즈(吴远之, 오원지)다.


금융업에 종사하며 차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그는 차창 인수 후 현대 푸얼차 공예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푸얼차 시장은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여러 지역에서 제대로 된 표준도 없이 제조되고 있었다. 그는 원료와 제조기술을 규범화하고 현대화된 가공 설비를 연구 개발해 푸얼차 제조 공정을 표준화하면서 푸얼차 강호를 안정시켰다. 푸얼차 명가로서 기업 가치가 상승하면서 부동산에서도 대박 신화를 썼다. 민영화 당시 1무(畝, 1무=666.67㎡)에 500위안 가격으로 인수한 땅이 현재는 2~3만 위안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부랑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멍하이 중심가 습지공원 남쪽에 자리 잡은 멍하이 차창을 향했다. 대로에서 공장지구로 들어가는 길 이름도 ‘차창로’였다. 세월만큼 때가 묻어 새까맣게 변해버린 대리석 사자상 두 마리가 소박한 아치형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차창은 중공업 공장을 연상시킬 만큼 큰 규모였다. 근무자만 1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제조 시설인 만큼 공장 출입은 엄격히 통제된다. 우리는 차를 타고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몇 십 분이 족히 걸렸다. 공장 주변에는 국영 차창 시절 형성된 대규모 직원 사택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일대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차창 마을’이었다. 주택은 단층 또는 이층의 군더더기 없는 건물로, 비바람을 막는 기능성에 집중한 탓에 마치 회색 상자처럼 보였다. 창문 밖에는 빨래가 널려있고, 노인이 문 밖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루쉰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뒷골목 풍경이었다.


멍하이 차창 창립 74주년과 민영화 10주년에 맞춰 2014년 멍하이 차창 안에 새롭게 문을 연 박물관 '대익관'


차창에서 유일하게 개방하는 곳은 서북문 안쪽 대익관이다. 멍하이 차창 74주년과 민영화 10주년에 맞춰 2014년 새 단장해 문을 연 박물관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이 날 문을 닫았다.


대익장원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복 사장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대익장원(大益庄园)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은 일반 관광객에게 유료로 개방하는 대익그룹 소유의 다원(茶园) 복합 리조트다. 다양한 품종의 차나무가 심어진 대규모 다원 안에 차마고도 마방이 머물던 마을을 재현한 옛 거리(古街)를 만들어두었다. 호텔과 차 체험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차밭을 지날 때는 길에서도 건강한 녹차향이 났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나니 수목원에서 삼림욕을 하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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