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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27. 2020

자사호가 색조화장에 물광 메이크업을?

젠수이 오색 자도(紫陶)

윈난 3대 고성 중 하나인 젠수이 고성(建水古城, 건수고성)은 리장 고성, 다리 고성에 비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나 역시 푸얼에서 위앤양 티티엔(元陽梯田)으로의 이동편이 애매해 우연히 경유하게 된 지역인데, 이곳에서 모처럼만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물건을 만났다.


젠수이 고성 동문 조양루(朝阳楼)는 젠수이의 상징과도 같다. 베이징 천안문을 닮아서 ‘작은 천안문’으로 불리는 600년 역사의 건축물이다. 조양루 동쪽 소계호(小桂湖) 주변에는 새롭게 상업거리가 조성돼 고성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조양루


젠수이에서 이틀을 묵기로 하고, 호수가 보이는 미식가 초입 계향호거민박(桂香湖居民宿)에 짐을 풀었다. 사계절 봄의 도시라는 쿤밍보다 남쪽인데, 흐린 날씨 때문인지 기온이 쌀쌀했다. 지역 토박이라는 사장은 요 며칠 유난히 추웠다면서, 종전에 없던 이상한파라고 했다. 몸을 녹이라며 로비 왼편의 차탁으로 나를 안내해 푸얼차를 우려 주었다.


무심코 그녀가 사용하는 다기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자사호가 색조화장에 물광 메이크업을 했네?!’

몸체는 분명 자사호처럼 생겼는데, 알록달록 무늬가 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차 주전자였다.

“자사호가 참 예쁘게 생겼네요. 평소 보던 것과 좀 달라요.”

자사호라는 말에 그녀가 펄쩍 뛰었다.

“자사호라니! 이건 우리 지역에서만 나는 오색토로 만든 건수 자도예요. 중국 4대 도자기 중 하나라고요. 자사호랑은 차원이 달라요!”


멋모르고 뱉은 한 마디가 젠수이 토박이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나는 야단맞는 심정으로 한참 동안 사장님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그녀는 건수 자도 전도사가 되어 얘기를 이어갔다.

“푸얼차를 뜯어서 담아두면 맛이 더 풍부해져요. 쌀을 담아두면 반년 동안 벌레가 생기지 않죠. 물을 담아두면 일 년 동안 상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 보니 차탁 위에 찻잎을 담아두는 작은 옹기가 있고, 바닥에도 큰 물항아리가 놓여있었다. 역시 알록달록한 꽃무늬와 넝쿨이 그려져 있는 제품이다.

“건수 자도는 공예 수준이 높고 가격도 괜찮아요. 광저우에 이걸 가져다 파는 친구가 있어요.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다고 우리가 불쌍하게 여겼는데, 건수 자도로 엄청 돈을 벌어서 요즘 제일 잘 나가요. 생각 있으면 내가 소개해줄 테니까, 가서 일 좀 배운 다음 한국에서 사업 해봐요.”

사장님의 화술이 어찌나 현란했는지, 하마터면 설득 당해 광저우까지 갈 뻔했다.


소계호 근처에 청년 예술가 두 명이 새로 문을 연 자도 공방 야오이야오(垚一垚)


우리나라에서는 ‘건수 자도’로 알려져 있는 윈난 젠수이 오채도(云南建水五彩陶, 건수오채도)는 장쑤 이싱 자사도(江苏宜兴紫砂陶, 의흥자사), 광시 친저우 니흥계도(广西钦州坭兴桂陶, 흠주니흥도), 충칭 룽창 안부도(重庆荣昌安富陶, 영창도기)와 함께 중국 4대 자도로 꼽힌다. 젠수이 교외에서 나는 적·황·청·갈·백 오색 점토로 만드는 도자기다. 젠수이 오색토는 철분 함량이 높으며 규소, 마그네슘, 칼슘 등이 포함되어 있어, 점성이 좋고 자성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젠수이 자도는 물레 성형을 한 도기에 무늬를 새기고 그 자리에 오색토를 메워 넣는 상감기법으로 만든다. 1,120~1,200도의 고온 가마에 구운 후, 유약 대신 연마 과정을 거쳐 광을 낸다. 보온, 통기, 방습, 탈취 기능이 탁월해, 윈난 명물 푸얼차와 홍차 등을 보관하거나 우려 마시기에 좋은 다관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싱 자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같은 취급을 했다고 민박 사장님께 혼쭐이 난 후 차이점을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첫째, 이싱 자사호의 재료는 수축률이 10% 미만에 점도가 낮은 석재인 반면, 젠수이 자도는 수축률 20%의 점도가 높은 점토다. 둘째, 이싱 자사호는 제단 된 면을 붙이고 기구로 두드리는 판성형을 하지만, 젠수이 자도는 우리 도자기처럼 손으로 물레질을 해서 만든다. 셋째, 이싱 자사호는 민무늬거나 표면을 파내 문양을 만드는데, 젠수이 자도는 음각에 오색토를 채워 넣어 다양한 색상의 그림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싱 자사호는 별도의 연마 공정이 없는 무광 제품인데, 젠수이 자도는 표면을 연마하여 광택을 낸다. 물론 무광 제품도 있다.


민박 주인은 유약을 바른 것처럼 매끈하고 반짝이는 찻잎 보관용 항아리를 문지르면서 추억에 잠긴 듯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연마할 때 기계도 사용하지만, 우리 어릴 적엔 그걸 다 손으로 했지. 숯 돌에 물을 묻혀서 수백 번씩 표면을 문지르면 반짝반짝 빛이 났지.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길 나누며 하는 소일거리였어. 내가 해 봐서 알지. 이건 유약 같은 건 전혀 안 바르고 연마해서 내는 광이라고.”

역시 광택의 비결은 ‘물광’이었다.  


건수 자도는 이싱 자사호처럼 짙은 자주색 제품도 있지만, 짙은 흑색에 흰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이 상품(上品)이다. 차 주전자뿐 아니라 찻잎이나 물 저장용 항아리, 조리기구, 화분 등 다양한 제품이 생산된다.


윈난에는 독특한 조리법으로 유명한 치궈지(汽锅鸡)라는 음식이 있다. 수증기로만 조리한 닭요리다. 물을 넣지 않고도 국물이 흥건한 맑은 닭곰탕이 만들어지는 신비한 조리법의 비결은 바로 젠수이 자도 ‘치궈(汽锅)’에 있다. 치궈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큰 뚝배기 같지만, 뚜껑을 열면 가운데에 신선로처럼 구멍이 난 원통관이 있다. 식재료를 담고 뚜껑을 덮어 찜통에 올리면, 수증기가 이 원통관을 따라 올라가 식재료를 익히면서 국물이 되는 것이다. 치궈지는 새해나 명절, 손님맞이 상에 올리는 음식이라고 한다. 닭을 뜻하는 기(鸡)와 운이 좋다는 뜻의 길(吉)이 중국어로 같은 발음 ‘지(ji)’라서, 복을 비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윈난의 모든 가정에서는 치궈를 꼭 하나씩 구비하고 있단다.


[영상 보기] KBS 치킨 인류 X 배달의 민족 : 윈난성 치궈지


젠수이 고성에서 북서쪽 3킬로미터 거리에는 건수자도가(建水紫陶街)가 있다. 5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도자기 가게 100여 개가 모여 있는 명물거리다. 건수자도가는 저녁에 더욱 활기를 띈다. 해가 지면 노점, 간식 판매점까지 더해 거대한 도자기 야시장이 선다. 길 한가운데 도자기 가마를 닮은 건축물이 있는데, 꼭대기의 굴뚝 모양 LED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며 야시장의 열기를 더한다. 


상점마다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의 제품을 판다. ‘공장 직영’ 문구를 붙여 놓은 상점은 중간 유통비 없이 저렴한 제품을 파는데, 조형미나 마감 실력이 제품마다 천차만별이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제품을 저렴하게 골라낼 수 있다.


거리 중간 중간 자리한 체험 공방에서는 40위안만 내면 직접 자도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자도를 빚어 놓고 가면, 건조와 소성을 거쳐 우편으로 부쳐준다고 한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한국까지 우편료도 만만찮겠지? 무엇보다 내 실력을 장담할 수가 없다. 아냐, 못난이면 어때? 기념인데. 한 번 시도해 볼까?’

망설이며 공방을 서성이는데 돌림판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 혼자 물레질이라니, 어쩐지 영화 ‘사랑과 영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편으론 낯간지럽고 한편으론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내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여행지에서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쇼핑을 한다. 첫째는 그 지역 특산품은 놓치지 않고 구입한다.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나 품질의 제품을 찾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제품이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사람을 생각하고 구매한다. 내가 가질 것인지, 누구에게 선물할 것인지, 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품목이 무엇일지 고려한다. 건수자도가에서는 고심 끝에 큰돈을 주고 차 주전자를 하나 샀다. 앞면에는 매화 문양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겨울 매화, 눈 속에 봄(寒梅雪中春)’이라는 글귀가 적힌 석표호다. 이 단아한 다구의 주인은 이번 여행의 숨은 조력자, 쑤저우 한시앙 다실의 사장님 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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