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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Jan 18. 2020

어느 식물학자가 불러온 나비효과

조셉 락과 잃어버린 지평선

리장고성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바이샤는 동네 입구부터 끝까지가 1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조그만 마을이다. 이 마을이 유명한 것은 명·청시기 그려진 독특한 벽화 때문이다. 바이샤 벽화는 라마교, 불교, 도교, 토속신앙 요소가 한 데 뒤섞여 있다. 나시족이 바이샤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시기, 나시 사회의 개방성을 상징한다. 관광버스를 탄 중국인 단체 관광객은 아침부터 몰려와 벽화를 구경한 후 기념사진을 잔뜩 찍고 썰물 빠지듯 사라진다. 마을에 묵는 몇 안 되는 객지 사람은 장기 체류자거나 배낭여행자일 가능성이 크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상가들도 서둘러 문을 닫는다. 어둠이 내린 마을에서 유일하게 심야 영업을 하는 곳은 서양인이 운영하는 카페뿐이다. ‘바이샤로나’, 바이샤와 바르셀로나를 합친 것 같은 가게 이름이 주인장의 출신을 짐작케 한다. 낮엔 커피, 저녁엔 술을 판다. 주 고객은 서양인. 이 가게에 검은 머리가 앉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바이샤로나에는 변변한 주방도 없고 그럴싸한 안주도 없다. 우수에 찬 황갈색 곱슬머리 아저씨와 주인이라기엔 손놀림이 어설픈 젊은 한량 등 서양인 몇 명이 번갈아가며 가게를 지킨다. 낮에는 서양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설산 트래킹 프로그램 같은 것을 운영하는 모양이다.


할 일 없는 초저녁 생활이 익숙지 않았던 한 달 살기 초반, 나는 맥주를 한 잔 마시려고 객잔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조명이 켜진 가게는 하나뿐이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바이샤로나에 입장하는 순간, 몇 안 되는 좌석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서양인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들만의 파티에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친 것처럼 놀란 눈치였다. 주인은 손님과 어울려 술을 마시느라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술병에 가격표가 붙어있어. 알아서 냉장고에서 꺼내 마셔.”

내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주인장은 혀 꼬인 영어 몇 마디를 하고는 옆 테이블로 가버렸다. 메뉴판을 보니 바쁘지 않을 때는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올려 햄버거나 감자튀김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오늘 주인장 상태로 봐서는 주방이 가동되는 날은 거의 없음이 확실하다. 중국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서양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술집을 하게 된 것일까? 작은 마을 바이샤엔 왜 이렇게 서양인이 많은 거지? 위룽쉐산 기슭 시골마을에서 나는 그 답을 발견했다.


1996년 대지진 전까지만 해도 리장은 중국보다 서양에서 더 유명한 이방인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서양인 배낭여행자는 페루의 마추픽추, 뉴질랜드 밀퍼드 사운드와 더불어 세계 3대 트래킹 코스로 꼽히는 호도협을 걷고, 바이샤에 머물렀다. 이들 대부분은 식물학자이자 탐험가, 그리고 인류학자였던 조셉 록(Joseph Charles Francis Rock, 1884-1962)의 영향을 받아 이곳에 오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시 문화와 리장을 서방에 처음 알린 그는 나시학의 대부, 윈난 문화의 거인이라는 칭송과 함께 중국 서남부 식물 자원과 동파경을 수탈해간 대도(大盜)라는 비판까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티베트 전통 복장을 입은 조셉 락

조셉 록은 1922년부터 27년간 여섯 차례 중국에 장기체류하며, 윈난, 쓰촨, 티베트 등지를 탐험하고 중국 서남부 지역 식물과 지리, 나시족 역사와 동파문자를 연구했다. 탐험 중 흥미로운 풍경이나 마을을 만나면 그곳에 머물면서 심층 연구를 했다. 현지인과 가까워지면서 다량의 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처음 중국에 발을 디딜 당시 그의 신분은 미국 농림부가 파견한 ‘플랜트 헌터’였다. 병충해에 강한 밤나무 종자를 찾으러 온 그는 중국 서남부 일대에서 8만 점의 식물표본을 수집해 가져갔다. 하버드대학교 아널드 수목원, 스미소니언박물관 등에는 아직도 그 자료가 남아있다.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식물의 학명은 해당 식물을 학계에 최초 보고한 명명자 이름을 맨 뒤에 붙이는데, 중국 서남부 자생 식물 중에는 조셉 록을 뜻하는 별칭이 붙은 학명이 적지 않다.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식물학자 한 사람을 떠올려보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쉽다. 수수꽃다리, 개나리, 금강초롱꽃 등 많은 한반도 자생 식물 학명에는 ‘나카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원 속에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조선 전역을 뒤져 식물을 채집해간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의 흔적이다. 그가 남긴 식물 종 정보와 분류법은 해방 후에도 한국 식물학계에 그대로 남아, 청산되지 않은 식민 잔재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악의적으로 조선의 흔적을 지운 ‘식물 창씨개명’과는 차이가 있지만, 조셉 록 역시 제국의 식물학자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의 활동은 서구열강의 식민지 식물자원 수탈과 식물도감 편찬 전성기였던 19~20세기 초 세계정세를 보여주는 한 조각이다.


조셉 록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2,000여 권의 동파경도 수집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파경은 나시족의 정치·종교 지도자 동파를 통해 전승되어온 기록물이다. 상형문자로 쓰인 동파경은 철학, 역사, 종교, 의학, 천문, 민속, 문학, 예술 등 나시족 문명 유산이 모두 담겨 있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리장에서 수집해간 자료들을 연구해 나시 문화에 대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가져간 동파경은 유럽과 미국 여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동파경이 많지 않은 탓에 일부에서는 그를 문화재 도둑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조셉 록이 살아있다면 이런 평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조금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조셉 록이 윈난의 자연과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탐험 중 알게 된 루구후 모쒀인 마을 사람들의 성병을 고쳐주기 위해 미국에서 페니실린까지 공수해왔었다니 말이다. 조셉 록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차가운 병상이 아니라 거대한 산의 벌판에서 죽기를 원한다.”


편지 속의 산은 아마도 윈난 일대의 설산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리장 위룽쉐산 남쪽 기슭 위후춘(玉湖村, 옥호촌)에는 그가 오랜 기간 머물렀던 집이 남아있다. 작은 중정을 둘러싼 2층 건물이 전설적 탐험가의 베이스캠프다. 1층은 그의 발자취와 기록물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이고, 위층에는 조셉 록이 남긴 사진 속 모습과 똑같이 재현된 그의 방이 있다. 입장료는 없지만 지킴이 할아버지에게 몇 위안을 주면 전시물을 잘 볼 수 있도록 조명을 켜준다. 할아버지가 외출하는 날은 문을 닫는다. 구경을 갔다가 운이 나쁘면 허탕을 칠 수도 있다.


리장 위룽쉐산 남쪽 위후춘(玉湖村, 옥호촌)에 있는 조셉 락 옛집

말하기 좋아하는 지역 사람들은 이 할아버지가 조셉 록의 현지 혈육이라는 확인할 길 없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그가 남기고간 유산을 물려받아 돈을 벌고 있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외국인인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방인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차별적 시선이 이런 것일까? 이곳 사람들이 서양인을 처음 보았을 그 시절, 외모도 언어도 다른 조셉 록의 정체성은 산간 오지 라마 왕국의 지도자를 쉽게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특권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일한 이방인으로 지역사회의 감시 아닌 감시 또한 받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어젯밤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동네 유일한 한국인 여성이 쓰촨 사람들과 어울려 훠궈를 먹다가 마카주 한 잔에 뻗어버렸다는 소식이 이미 마을에 다 퍼졌겠지? 아이고, 망신스러워서 오늘은 동네 산책을 쉬어야겠다.


이상향의 탄생, <잃어버린 지평선>


1928년 3월 조셉 록은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역사적 도보 탐사에 나섰다. 목적지는 리장의 동북쪽 쓰촨 성 서부, 흔히 동티베트라 부르는 지역이다. 두 차례 탐사를 마친 그는 당시 촬영한 사진과 함께 르포를 송고했다. 매체는 그가 활동 자금을 지원 받은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다.


1931년 7월 게재된 조셉 록의 글과 사진에 영감을 받아, 작가 제임스 힐튼은 1933년 4월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발표했다. 소설 속에서 인도 바스쿨 폭동을 피해 비행기에 탄 영국 외교관 콘웨이 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종사에 의해 공중 납치돼 티베트의 험한 산꼭대기에 불시착한다. 조종사가 죽고 고원에 고립된 네 사람은 신비한 중국인 장(张)의 안내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비한 낙원 ‘샹그릴라’에 가게 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상향 샹그릴라는 거대한 만년설산 아래 자리한, 세월이 매우 느리게 흐르고 근심과 고통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대공황 시기였다. 1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전쟁 특수가 끝났지만, 돈에 눈이 먼 기업가들은 설비투자를 이어나갔다. 과잉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 넘쳐나도 시민들은 소비 여력이 없었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으로 1920년대 대호황기가 끝나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넘쳐나며 농산물 가격마저 폭락하던 이 시기, 소설에 묘사된 이상향 샹그릴라는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전 세계는 샹그릴라 열풍에 휩싸였다. 포캣 북으로 발간된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제임스 힐튼은 40세 이하 젊은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 문학상 호손덴 상(Hawthornden Prize)의 영예를 안았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1937년과 1973년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조어 ‘샹그릴라’는 이후 이상향이나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세계적인 고급 호텔 리조트 체인 중에도 이 이름이 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대표단이 머물렀던 숙소가 바로 1971년 설립된 샹그릴라 호텔 1호점이다.


‘캠프 데이비드’라고 부르는 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의 이름도 사실은 샹그릴라였다. 1938년 개장 당시 캠프 데이비드는 ‘하이-캐톡틴(Hi-Catoctin)’이라 불리는 연방 공무원 휴양지였다.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휴가 기간 동안 낚시 여행을 떠나거나 비공식 접견을 할 때 대통령 요트 ‘포토맥(USS Potomac)’을 이용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안전 문제가 우려되면서 1942년 외딴 지역에 있던 하이-캐톡틴을 최고사령관의 캠프로 삼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대통령 별장 이름을 샹그릴라로 명명했다. 자신이 취임하던 해 출간된 소설 속 평화의 땅 이름으로 말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5월 샹그릴라로 영국 총리 처칠을 초청해 2차 세계 대전 종전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 대통령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샹그릴라는 1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버지와 손자 이름을 따서 별장 명칭을 캠프 데이비드로 바꿨기 때문이다.


샹그릴라의 흔적은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대척점에 있던 나치 독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인종주의를 정당화할 근거를 샹그릴라에서 찾고자 했다. 나치 지도부는 1939년 친위대 5명을 히말라야 지역으로 파견했다. 탐험대의 임무는 티베트 일대에서 고대 게르만족 아리안의 뿌리를 찾고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탐험대는 도착하자마자 영국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1944년 탈출해 티베트에서 7년 간 은둔생활을 했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는 이후 당시 체험담을 담은 자서전 『티벳에서의 7년』을 출간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자서전에서 그는 산악인 신분으로 등반에 나섰던 것처럼 기술했지만, 영화 개봉 후 역사 왜곡을 우려한 오스트리아 언론인의 폭로로 그가 나치 친위대 스파이였던 사실이 공개되었다.


‘원조’ 논쟁 속 개명까지 감행한 중덴


샹그릴라를 실존하는 지역으로 생각한 것은 나치뿐만이 아니다. 많은 학자와 탐험가들이 소설 속 샹그릴라를 현실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네팔, 부탄, 중국 내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다. 가장 골치 아픈 곳은 중국이었다. 윈난, 쓰촨, 티베트 등 히말라야에서 가까운 여러 지방정부에서 서로 자기 지역을 샹그릴라로 홍보하며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곳은 윈난성이었다. ‘샹그릴라’ 선점을 위한 속전속결 저돌적 행보는 ‘샹그릴라 공정’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1997년 윈난성 정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티베트인 집거지 중덴현(中甸县)이 바로 샹그릴라라고 선언했다. 역사, 지리, 언어, 종교 등 각 분야 전문가 수십 명이 1년 여 동안 연구한 결과, 이곳이 소설 속 묘사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샹그릴라라는 이름은 내 마음속 해와 달이라는 뜻의 티베트어 ‘샴발라(Shambala)’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2001년에는 중앙정부에 개명 신청을 해 공식적으로 이름까지 바꾸고 관광객 유치로 대박을 쳤다.


쓰촨과 티베트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갈등 끝에 2004년 3개 지역 정부는 협력 선언에 서명하며 평화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단체 간에 ‘원조 논쟁’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대게 최대 산지 울진과 집산지 영덕 간 ‘대게 원조’ 갈등은 법정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제적 이득을 둘러싼 지자체의 브랜드 쟁탈전은 한국과 중국이 다르지 않다.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달라진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03년 샹그릴라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시킨 지역 정부는 관광 자원 개발에 나섰다. 문화대혁명 시기 파괴된 티베트 불교사원도 복구하기 시작했다. 최대 종파 겔룩파 6대 사원 중 하나인 숭짠린스(噶丹·松赞林寺, 송찬림사)도 복원됐다.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을 빼닮아 ‘소포탈라’로 불리는 아름다운 황금빛 사원은 이제 샹그릴라의 상징이 되었다.

두커종구청(独克宗古城, 독극종 고성)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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