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리장고성(丽江古城)
“지난번엔 랑야방이더니, 이번엔 사마의야?”
언제부턴가 집에 들어오면 TV를 틀었다. 애당초 집중해서 무엇을 보겠단 목적은 아니었다. 적막함이 싫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저 누군가 중얼거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중국 드라마는 괜찮은 선택지였다. 웬만한 작품은 40부작 이상이라 매번 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루 한 편씩 틀어놓고 오며 가며 봤다. 기분 탓인지 듣기 실력이 느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온 친구가 TV를 보고 한 마디 했다.
“계속 사극만 보네? 중국도 사극은 말투가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것 아닌가? 너 그러다가 좀 있으면 명나라 공주처럼 말하는 거 아니야?”
아뿔싸! 중국 친구들 중에도 꼭 그런 애가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대장금, 동이 같은 사극을 잔뜩 보고 와서는 이상한 말투를 쓰던 스창. 모국어인 중국어로 말할 때는 황제 저리가라 할 만큼 중후한 목소리인데 한국말만 하면 한 옥타브 올라간 내시 톤을 구사해서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했던 중국 친구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장르를 바꿔보기로 했다. 최신 유행하는 판타지 사극도 사극이니 안 되고, 시대극은 이념색이 짙어 후보군에서 탈락, 결국 현대극으로 눈을 돌려다. 직장인 남녀가 등장하고 최신 어휘를 배울 수 있는 트렌디 드라마로 최종 낙점. 2016년 중국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한 ‘친애적 번역관’도 그렇게 보게 된 작품 중 하나였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재미있는 지명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 양미가 여행사와 휴가지를 상담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쿤다리’. ‘쿵따리 샤바라’가 연상되는 이 단어는 쿤밍(昆明, 곤명), 다리(大理, 대리), 리장(丽江, 여강)의 줄임말이었다. 윈난에서 가장 유명하고 볼거리도 풍부한 여행지 3종 세트을 일컫는다. 쿤밍(1,890미터)에서 다리 고성(2,000미터)을 거쳐 리장 고성(2,400미터)으로, 고도를 차츰 높여가며 북쪽으로 향하는 노선은 고산증 예방에도 좋은 윈난 입문 코스다. 한국 직항이 있는 쿤밍에 내려 여행을 시작할 경우, 기차로 2시간 정도면 다음 도시로 이동할 수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여행지를 꼽으라면 단연 윈난성 리장이다. 성도인 쿤밍, 오랜 교통 문화 요지 다리에 비해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몇몇 예능 프로그램에 리장고성(丽江古城, 여강고성)이 소개되면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도 리장이 주목받게 된 것은 3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명성은 사상 최악의 대지진으로 시작되었다.
1996년 2월 3일 토요일 저녁,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본진 이후 2,529 차례나 여진이 이어졌고, 그중에는 여진이라 부르기 무색할 만큼 강력한 규모 6.0의 강진도 있었다. 지진의 영향은 광범위했다. 리장은 물론 북쪽 중젠(中甸, 중전), 서쪽 젠촨(剑川, 검천), 남쪽 허칭(鹤庆, 학경), 더 남쪽 얼위안(洱源, 이원) 현까지 피해를 입었다. 리장시와 주변 지역 건물 20%가 무너졌고, 사상자는 17,221명에 달했다. 많은 중국인이 이 참담한 광경을 TV로 지켜보며 비로소 리장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리장고성은 이미 1년 전 세계문화유산 등록 신청을 한 상태였다. 지진이 발생하자 유네스코는 유산이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신청을 취소할지 물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의외의 답을 듣게 되었다. 콘크리트로 지은 시가지의 신축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전통 목조 건물로 가득한 800년 역사의 고성은 피해가 훨씬 적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보름 후 유네스코가 파견한 전문가들이 여진의 위험 속에서도 리장을 찾았다. 현장 조사 과정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축물과 나시족 문화를 목격했다. 유네스코는 리장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절차를 계속 진행하기로 하고, 고성의 복원을 위해 4만 달러의 긴급 자금을 지원했다. 이듬해인 1997년 리장고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역 정부는 발 빠르게 피해를 복구하면서, 관광업을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1997년 100만을 돌파한 리장 관광객 수는 2018년 2,600만 명을 넘어섰다. 60대가 청년회장을 한다는 우리나라 시골과 달리, 윈난 서북부 리장과 샹그릴라 등지에는 젊은이가 많다. 지역에 돈이 풀리면서 청년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기회의 땅을 찾아온 외지인은 물론이고,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나갔던 젊은이도 팍팍한 객지 생활보다 고향에서 가업을 잇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귀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리장고성에서 묵을 곳을 정하려고 객잔 여섯 곳을 둘러보았는데, 이 때 마주친 직원은 매니저부터 메이드까지 모조리 20~30대였다. 그들은 유니폼을 갖춰 입지도 않았고, ‘고객님, 카드키 나오셨습니다’ 같은 백화점식 높임법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무심한 듯 말하면서도 친구를 챙기듯 성심을 다한다. 손님 응대도, 서비스 방식도 대형 체인 호텔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서비스 노동자의 과도한 친절이 감정노동의 결과물 같아 늘 불편했던 나로서는 오히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매력을 가진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중소 숙박업소를 무리 없이 운영하기에는 충분한 능력이다. 800살 고성이 여전히 생기를 가진 마을로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은 이런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활력이었다.
리장고성이 유명세를 탄 후 우리나라 지역정부나 기관이 벤치마킹에 나섰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수로를 놓자, 지역 문화를 스토리로 공연을 만들자 같이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지방소멸을 막고 지역의 역동성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사람이다. 지역 젊은이가 떠나지 않도록 도전의 기회가 열려있고, 떠났던 청년도 돌아오게 할 매력적 이야기가 있는 지역을 만드는 것, 그것이 리장에서 얻어야할 힌트가 아닐까?
균형발전과 지역 활성화는 비수도권 출신인 나의 오랜 관심사였다. 전국에서 20~30대 청년인구가 가장 많이 유출되는 지역이 바로 나의 고향 부산이다. 나고 자란 남구의 경우, 인구가 줄어들어 곧 선거구 두 개를 하나로 합쳐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한다. 나는 졸업 무렵 한 치 의심도 없이 서울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부산에는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똑같은 생각으로 무수한 청년이 수도권을 향했을 테니, 지방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30대에는 부모님 가까이 살며 건강은 괜찮으신지 자주 살피고 싶었지만, 여전히 생계가 걸림돌이었다. 나중에는 경험을 살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커뮤니티 사업, 지역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 같이 공익과 경제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일을 구상했지만 귀향 결심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대로 우물쭈물 하다가는 노인이 되어서야 부산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처음 의도와 달리 고향의 저출산 고령화에 기여하게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중국 사극 속으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고성 거리, 이름부터 신비함이 감도는 위룽쉐산, 동파교(东巴教)를 믿고 동파문자(东巴文字)를 쓰며 1천 년 역사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소수민족 나시족(纳西族)의 생활상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못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리장의 치명적 매력은 여행자를 몇 달이고 눌러앉게 만들기도 한다.
리장고성은 다옌(大研古镇, 대연고진), 수허(束河古镇, 속하고진), 바이샤(白沙古镇, 백사고진) 이렇게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부터 규모가 크고, 뒤에서부터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흔히 리장고성으로 알려진 곳은 다옌이다. 송말 원초 13세기 후반에 건설된 리장 중심지로, 독특하게도 '성벽이 없는 성'이다. 당시 이 지역 통치자가 목 씨였는데, 고성 주위에 벽이 있으면 목(木)자가 구(口)자에 둘러싸인 곤란할 곤(困)자 모양이 되기 때문에 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통치자 목 씨의 저택이자 관청이었던 목부(木府)는 한국 배우 추자현이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얻은 중국 드라마 '목부풍운(木府风云)'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고성 돌길을 걸으면 수백 년 전 이 거리를 분주하게 오고 갔을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또각또각 신발 굽과 석판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상상 속에서 나는 서역에 팔 찻잎을 말 등에 잔뜩 올리고 차마고도로 긴 여정을 떠나는 무역상 마방(馬幇)이 되었다가, 이방인의 눈으로 미지의 땅 윈남과 티베트 일대를 탐험하는 마르코폴로가 되기도 했다.
다옌구전 동북쪽 헤이룽탄(黑龙潭, 흑룡담)공원은 위룽쉐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솟아나 호수를 이루는 곳이라 하여 옥천(玉泉)이라고도 불린다. 이 물은 수천 갈래 물줄기로 나뉘어 리장의 고성마을 곳곳을 흐른다. 맑은 물에 비친 설산과 하늘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는데, 위롱쉐산은 구름에 숨어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호수 중앙에 우뚝 서있는 득월루(得月樓)의 현판과 정면에 걸린 주련의 시는 근대 중국 최고 지식인으로 시인, 역사학자, 고고학자, 극작가, 그리고 정치가였던 궈모러(郭沫若, 곽말약)의 친필이다. 오른쪽에는 마오저둥(毛泽东) 주석이 옛 시에서 발췌 편집한 시, 왼쪽에는 궈모러가 쓴 시가 적혀있다. 득월루에 앉아 시를 곱씹으며 흑룡담의 봄과 겨울을 상상해보았다. 폭신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호숫가에 늘어진 버드나무가 봄을 알아 싹을 틔우고, 금세 수천수만 개의 나뭇잎이 돋아나 팔랑거리겠지. 겨울이 오면, 삼백만 옥룡의 갑옷 비늘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흩날리는 눈송이가 산과 대지를 뒤덮을 것이다.
이른 아침 습기를 머금은 고성 골목에선 구수한 향이 났다. 밥 짓는 냄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쩔쩔 끓는 구들장에 누워, 허리 굽은 할머니가 우리를 위해 준비하던 아궁이 가마솥 밥 냄새가 떠올랐다. 한옥과 다세대 주택이 뜯겨나가고 끊임없이 하늘로 아파트 성이 올라가는 한국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운치다. 우리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옛 것을 싹 밀어버리고는 일부러 시간을 내 한옥마을로 놀러 간다. 낮이면 손님맞이 이벤트가 성대하게 벌어지지만 해가 지면 빈 집만 남는 민속촌은 거대한 놀이동산이자 유령마을이다. 천년 역사의 리장고성은 여전히 나시족이 아이를 키우고 앞마당에 옥수수를 널어 말리는 삶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대도시의 일인 줄만 알았던 젠트리피케이션이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고성의 상업화가 심화되면서 임대료는 오르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다옌 중심 사방가에서 목부로 가는 길에는 ‘관원구’라는 아치형 석문이 있다. 옛날 관원들이 관청 출퇴근을 위해 드나들던 입구인가 싶었는데, 부자 관원과 가난한 백성의 거주지를 구분하는 경계였다고 한다. 관광업이 융성한 지금은 관원구 안팎 할 것 없이 고성 도처 어딜 보아도 비슷한 상점과 객잔뿐이다. 상업화가 불러온 획일화가 빈부 격차와 신분 차별의 흔적마저 덮어버렸다. 고대의 정취를 간직한 고성에서의 고즈넉한 삶을 꿈꾸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도 문화도 상권도 관광객도 옮겨간다. 숙주가 생명을 다 하면 또 다른 숙주를 찾아 가는 바이러스처럼, 상업화는 다옌에서 수허로, 그리고 다시 바이샤로 옮겨가며 나시족 원시생활의 흔적들을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