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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17. 2020

순례자를 기다리는 찬란하神 만년설산

티베트인의 성산 메이리쉐산

입춘이 열흘이나 지나 갑작스레 내린 꽃샘눈으로 SNS 타임라인이 겨울왕국으로 변한 아침, 창밖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보며 메이리쉐산(梅里雪山, 매리설산)의 설경이 생각났다. 성지순례 온 티베트인만큼이나 간절했던 나의 기도를 들어준, 신성하고 찬란하神 만년설산. 


메이리쉐산은 티베트와 윈난성 경계에 위치한 총 길이 150킬로미터의 설산군이다. 티베트의 카일라스(冈仁波齐), 칭하이(青海) 성의 아니마칭(阿尼玛卿), 가둬쟈오워(尕朵觉沃)와 함께 티베트 불교의 4대 신산(神山)으로 불린다. ‘메이리’라는 이름은 티베트어로 약산을 의미하는데, 이곳 원시림은 다양한 종류의 귀한 약재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윈난성에서 가장 높은 해발 6740미터의 카와거보(卡瓦格博, 가와격박)를 중심으로 주변에 펼쳐진 해발 6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을 ‘태자13봉’이라 부른다. 그렇다고 13개 봉우리를 모두 세어보려고 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티베트인의 상서로운 숫자 13을 붙였을 뿐, 실제 봉우리 수는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티베트어로 설산의 신이라는 뜻을 가진 주봉 카와거보는 아직 그 누구도 정상을 밟아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성산이다. 태자13봉 중에서도 남쪽의 미엔츠무(面茨姆)봉은 뾰족하게 솟아오른 화려한 형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목을 끄는 매력적인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곳을 카와거보로 착각하기도 한다. 미엔츠무는 전설 속에서 바다의 여신으로 그려지고, 현지에서는 신녀봉이라고도 불린다. 카와거보의 아내이자 위룽쉐산의 딸로, 고향을 그리워해서 남쪽 리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위룽쉐산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메이리쉐산의 주봉 카와거보(卡瓦格博, 가와격박)봉
미엔츠무(面茨姆峰)봉

메이리쉐산은 티베트인이 평생 한 번은 꼭 찾아오고 싶어 하는 성지다. 매년 수확철이 끝나고 나면 윈난은 물론 인근 성 티베트, 칭하이, 쓰촨 등지에서 온 티베트인이 길게는 보름 이상 걸리는 설산 외곽 순례길를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티베트 불교 신자가 아닌 일반 관광객도 이곳에서 일조금산을 보면 신성한 기운을 받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메이리쉐산의 일조금산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해발 고도가 더 높은 고산지대라서 기상이 수시로 바뀌는 데다, 교통 또한 불편한 오지이기 때문이다.


샹그릴라에서 아침을 먹고 가라는 사장의 호의도 사양하고 8시에 서둘러 객잔을 나섰다. 일찍 버스터미널에 가서 표를 확보하고 천천히 아침을 먹을 요량이었는데, 너무 빨리 도착한 탓에 5분 뒤 출발하는 8시 50분 버스를 타게 되었다. 목적지는 메이리쉐산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대 중 가장 유명한 페이라이스(飞来寺, 비래사). 전각이 따로 없고, 흰 탑 8개가 놓여있는 독특한 사찰이다. 샹그릴라에서는 페이라이스로 가는 직행 버스가 없어 더친(德钦, 덕흠)행 버스를 탔다. 메이리쉐산을 보러 가는 승객이 많을 경우, 종점 더친에서 잠시 정차 후 1인당 5위안씩 더 받고 페이라이스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니 도착해서 상황을 봐야한다.


요기할 틈도 없이 짐 검사를 하고 검표를 마친 후 차에 올라탔다. 대형버스 안에 승객이라고는 나를 제외하고 중국인 12명이 전부. 어젯밤 객잔 사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이 손님 없는 비수기라서 주방을 맡은 동업자가 고향에 갔어요. 당분간 저녁엔 식당을 운영하지 않으니까 주변 맛집을 추천해드릴게요.”

건기에 접어드는 10월 이후부터가 메이리쉐산 태자13봉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인데, 11월이 여행 비수기라니 어찌 된 일일까? 중국의 여행 성수기는 5.1 노동절과 10.1 국경절 기간을 말한다. 장기 휴가가 보장되는 연휴다. 이 기간에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도 무료라서, 많은 중국인이 차량을 이용해 여행에 나선다. 그래서 이때 여행을 떠나면 길 위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버스는 진사장(金沙江, 금사강) 줄기를 따라 214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메이리쉐산으로 가는 왕복 1차선 도로는 꼬불꼬불 급커브가 수십 번이다. 길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진사장과, 때로는 계곡 건너 산봉우리를 가린 구름과 눈높이를 맞춰 달렸다. 창 밖에는 순간순간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돌산에 빙하가 녹으며 만들어놓은 물길의 흔적은 조각칼로 긁어낸 듯 날카롭고 선명했다.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웅장한 산을 보고 있자니, 겸손해지는 동시에 담대해진다. 대자연의 호연지기란 이런 것일까?

 

버스 기사는 도로 중간 중간 소떼들이 지나가면 경적을 울렸다. 길을 내달라는 신호에도 아랑곳 않고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 녀석들 앞에선 제아무리 큰 트럭과 버스라도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노랗게 단풍이 들어가는 산등성이 뒤편으로 솟아오른 설산이 보였다. 바이마쉐산(白马雪山, 백마설산) 3호 터널 입구에 들어설 때 눈발이 가볍게 날리더니,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왼편에 해발 5,640미터의 장엄한 바이망쉐산(白茫雪山, 백망설산)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차에 탄 중국인들마저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아직 감탄을 하긴 이르다. 한 시간을 더 달리면 설산의 신 메이리쉐산 카와거보를 만나게 될 테니까.


비수기의 비극은 더친 버스터미널에서 현실화되었다. 중국인 승객 20명이 모두 내린 것이다. 페이라이스까지 가는 승객은 달랑 나 하나. 버스 기사는 사람이 적어서 못 데려다주겠다며 다음 차를 기다려보라고 했다. 이 동네에는 커피숍도 없어서 두 시간을 죽칠 곳이 마땅치 않았다. 12시가 못 된 시각,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버텨보기로 했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두 시간, 기다린 보람도 없이 다음 차 탑승객 17명도 모두 터미널에서 내려버렸다. 난감해하는 내게 기사 아저씨 몇 분이 다가와 목적지를 물어보더니, 허름한 미니버스 한 대를 가리키며 페이라이스를 지나가는 차라고 알려주었다. 배차 간격이 짧은 마을버스가 있는 것도 모르고, 동네 사정을에 어두운 시외버스 기사 말만 믿다가 두 시간을 허비한 셈이 됐다. 


마을버스를 타고 40분을 더 달려 메이리쉐산 전망대 페이라이스(飞来寺, 비래사)에 도착했다. 짧아진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안개가 심해서 산도 보이지 않고, 추운 계절 탓인지 궂은 날씨 탓인지 관광객도 보이지 않았다. 일조금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숙소 예약도 하지 않은 탓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객잔 몇 곳을 둘러보았다. 페이라이스 바로 앞에 위치한 더친쉐룽메이리이쥐 호텔(德钦雪龙梅里逸居酒店, 덕흠 설룡 매리 리조트 호텔)의 위치와 시설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이 비싸 잠시 망설이는 나를 매니저가 할인을 해주겠다며 붙잡았다.

“날씨가 이런 날은 손님이 없어요. 그래서 특별히 싸게 해 드리는 겁니다.”

“여행 일정은 미리 정해진 것일 텐데, 날씨랑 무슨 상관이 있으려고요.”

“리장이나 샹그릴라에서 일기예보를 보고 있다가 비나 눈이 온다고 하면 당일에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사실 고산지대에서는 맑다가도 금방 구름이 끼고, 흐리다가도 다음날이면 맑게 개기도 하기 때문에 와보지 않고는 일조금산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는데 말이죠.”

한 곳에서 여러 날 머물기 어려운 단기 여행객에게 변화무쌍한 고산지대 날씨는 큰 장애물이다. 고생스럽게 갔다가 운무만 보고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 보니 이런 비매너 꼼수를 쓰는 사람들도 있나 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새벽녘 눈이 번쩍 떠졌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일출 시간이 한참 멀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밖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창가에 다가가 얇은 커튼을 젖혔다. 어둠 속에서도 메이리쉐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밤사이 거짓말같이 날씨가 갠 것이다. 티끌 한 점 없는 코발트블루 캔버스 위에 태자13봉이 검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일조금산은 종교적 신비감을 지니고 있었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중국인 아저씨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일조금산을 보다니!”

매니저의 말이 맞았다. 정직하고 뚝심 있는 여행자만이 꼼수를 부린 사람은 보지 못한 장관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는 것이다.

페이라이스 백탑 뒤로 펼쳐진 메이리쉐산의 일조금산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해가 뜨고 수증기가 증발하며 만들어진 구름 띠가 곧 카와거보를 삼킬 듯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페이라이스에도 내려가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에선 새벽부터 소원을 빌러 온 사람들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향나무 가지를 물에 적신 후 태워서 연기공양을 하는 것이다. 액운을 태우고 자신을 정화하는 의미라고 한다. 메이리쉐산 방향의 데크 난간에는 오색 깃발 타르초가 펄럭이고, 그 앞에는 밤새 얼어붙은 바닥에 엎드려 말없이 오체투지로 절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 어떤 소원을 저리도 간절하게 비는 걸까 생각하며, 나도 그들을 따라 8개의 백탑을 돌며 기도했다.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한국에서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입원하셨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장 리장으로 내려가 맡겨둔 짐을 찾아 귀국할 생각이었다. 병원에 함께 간 동생이 나를 진정시키며 상황을 전해주었다. 쓰러지신 것이 아니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어지러워서 병원에 갔다가 경미한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상세한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계획했던 일정은 일단 소화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지로 가면 전화 신호가 끊기는 경우가 많아서, 중국 친구들이 강력 추천한 메이리쉐산 내선 코라의 위뻥(雨崩) 마을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메이리쉐산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순례자를 기다려줄 테니까.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메이리쉐산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연락이 왔다. 일곱 살, 다섯 살 난 조카 둘을 형부에게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간 언니가 경과를 알려주었다. 초기 약물 치료로 어지럼증은 사라졌고, 하늘이 도왔는지 후유 장애도 전혀 없다고 했다. 경과가 좋아 곧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언니는 말했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기회를 주신 것 같아.”

‘그래, 하늘이 기회를 주신 것 같아. 귀국하면 제일 먼저 아빠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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