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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Jan 11. 2020

[참고하세요] 춤추다 고산증

한국인은 잘 모르는 고산지대의 위험

멋진 풍경을 봤을 때 춤이 절로 나오는 흥부자라면, 윈난에 갈 때 특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장 북부에 자리한 위룽쉐산은 히말라야 산맥 끝자락이자 북반구 최남단 설산이다. 드라마틱한 산세와 로맨틱한 전설에 이끌려 매년 4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장엄한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예모 감독의 ‘인상리장(印象丽江, 인상여강)’ 공연장도 바로  이곳에 있다. 위룽쉐산은 일출이 만년설에 비쳐 황금빛을 내는 ‘일조금산(日照金山)’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리장 한 달 살기 중 잠시 놀러오겠다는 친구 민아를 위해 일조금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비싼 호텔을 큰맘 먹고 예약했다. 대학 동기 민아는 성격도 활동성도 나와 정 반대인 20년 절친이다. 민아의 첫 중국 여행은 내가 베이징에 있던 2010년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그 무렵 가장 친한 친구 세 명이 모두 외국에 가 버리는 바람에 그나마 가까운 베이징으로 놀러 온 것이다. 민아는 이후 너무 심심해서 연애를 하다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는 옆 지기가 있으니 나와 긴 여행을 하긴 어려워졌다. 이번 여행은 유부녀 민아와 함께 하는 첫 중국 여행이자 다시없을지 모를 우정 여행인 셈이다.


시내에서 셔틀버스로 30분쯤 달려 위룽쉐산 풍경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진마오 퓨어렉스 마운틴 호텔 리장, 인상리장 공연장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호텔이다. 체크인을 마치고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거대한 설산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백만 불짜리 마운틴 뷰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노천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 인상리장. 500여명의 출연자는 모두 현지 출신의 소수민족이다.

민아는 짐도 풀기 전에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눈으로만 보는 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삼각대를 테이블 위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설산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가 싶더니, 급기야 흥이 나서 춤을 춘다. 말춤과 꽃게춤의 중간 어디쯤, ‘춤추는 매트’를 연상시키는 몸부림이다. 인생 최대 흑역사가 될 수도 있는 이 영상은 소수의 지인에게 전송되었다. 여행지에 잘 도착했음을 알리는 인증샷으로 말이다. 리장을 처음 소개해준 선배 한 명도 안구 테러를 당한 장본인 중 하나였다. 영상을 본 선배는 이렇게 한 줄 평을 남겼다. “‘인상리장’보다 인상적이네! 푸하하하!”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막춤이 가져올 재앙을 알지 못했다.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갈 무렵 저녁 식사를 하러 나섰다. 신발을 갈아 신고 운동화 끈을 매던 민아가 말했다. “앞구르기 할 것 같아.” 되돌아보면 그게 신호였던 것 같다. 어지럼증이 시작된 것이다. 민아는 식당 건물로 가는 100미터 남짓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데도 숨이 차다며 걷다 멈추길 반복했다. 저지대에서는 총총 뛰어갔을 길을 슬로모션 속도로 걸었다. 해발 3,100미터 고산지대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부터 두통, 매스꺼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그렇다고 누울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숙취, 심한 입덧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증상이다.


객실에는 헤어스프레이 크기만 한 산소 캔 두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민아를 쫓아다니며 산소라도 마시라고 통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서 급기야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방 번호를 묻더니 약을 가져다주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이런 사람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분위기다. 잠시 후 벨이 울렸다. 야간 당직을 서던 앳된 얼굴의 직원이 뭔가 조심스레 내밀었다. 80년대에나 보았을법한 갈색 유리관에 요구르트 빨대 같은 것을 꽂아서 준다. “‘홍경천’을 쭉 마신 다음, 산소도 계속 마셔야 해요.”


홍경천? 허접한 포장 용기에 놀란 나는 못 먹을 것을 받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바이두에 검색해보니 가짜 약은 아닌 것 같다. 리장고성 주변 슈퍼마켓에서도 파는 대중적인 약이라고 한다. 주원료는 제품명과 동일한 이름의 약용 식물이었다. 중국에서는 피로 회복, 다이어트, 아토피 억제, 신장 기능 개선, 설사 및 타박상 치료, 심혈관 및 뇌혈관 질환 예방, 심지어 정력 증진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쯤 되면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사실 홍경천은 불로초를 구하러 온 진시황의 사신이 티베트 지역에서 가져간 약초라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위룽쉐산에서의 잠 못 드는 밤이 지나고, 다음날도 민아는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조금산을 촬영하고 돌아온 나는 여전히 이불속에 있는 민아에게 저지대 마을로 내려가자고 했다. 이틀을 예약하긴 했지만 일찍 체크아웃을 하자고. 민아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비싼 방 값도 아깝고 옥룡설산 풍경은 더욱 아까워서 좀 버텨보겠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고산증은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홍경천 효과인지 몸이 자연스레 고산지대에 적응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산을 내려오며 고산증 소식을 전했더니, 그제야 조언이 쏟아졌다.

“인증샷 찍으려고 점프했다가 고산증 온 사람도 있대.”

“머리도 감으면 안 되고, 샤워도 자제해야 해. 특히 뜨거운 물은 쥐약이야.”

“엄홍길 대장 같은 산악인도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고산증에 걸리기도 한대.”

“과음은 금물인데, 술 마신 건 아니지?”

포털을 검색하니 더욱 무시무시한 정보가 떴다.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증상이 나타난 후에는 백약이 무효하니, 증세가 자연 완화되지 않으면 신속하게 산을 내려와야 한다.”

민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왜 가기 전에 아무도 얘길 안 해줬냐! 이렇게 위험하고 중요한 걸!”


고의는 아니었다. 누구도 심한 고산병 증세를 경험하지 못했던 탓일 뿐. 어떤 사람은 속이 조금 메스꺼운 정도였고, 어떤 사람은 며칠간 샤워도 안 하며 몸조심을 한 덕분에 별다른 증세를 겪지 않았다고 한다. 나 역시 평소보다 많이 졸리고 쉽게 숨이 차는 정도여서, 이런 격렬한 증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산증은 갑자기 고도가 높은 곳에 갔을 때 저기압과 저산소로 인해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피로, 식욕부진, 호흡곤란, 어지러움, 두통, 구토, 불면 같은 급성 고산병은 저지대로 내려오면 금방 완화된다. 고지대에서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해 저절로 호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드물게는 고소뇌부종과 고소폐부종 같이 치명적인 형태로 나타나 생명을 위협한단다. 고산지대에 갈 때는 무리한 일정을 피하고, 출국 전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고산증 약이라면 많은 사람이 비아그라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산증이 가장 화제가 된 순간은 아마 탄핵 촛불이 한창이던 2016년 겨울이 아니었을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민심이 들끓던 당시, 청와대가 국민 세금으로 발기부전 치료제까지 샀다는 폭로가 나왔다. 망측스런 이야기에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의무실장은 해외 순방 때 고산병 예방과 치료 용도로 구입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오히려 그 해명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는 의사에게 물어보니, 고산증에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산증 예방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비싼 비아그라를 처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일을 다시 떠올린 건 이후 청와대 근무 시절이었다. 심한 감기 증상에도 병원 갈 짬이 나지 않아 의무실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기분 탓일까? 전화선 너머 직원은 수세적 태도였다. 편의점에 파는 수준의 감기약만 구비해두었고 처방이 필요한 다른 약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저 상비약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나는 예상치 못한 TMI(Too Much Information)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의무실로 감기약을 받으러 가면서 어쩐지 비아그라 이야기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윈난에서 호되게 고산증을 다 겪고 난 후에야 그 때 일이 기억날 게 뭐람.


고산증은 보통 해발 2,000미터 이상 지역에 도착한 후 수 시간 내에 경미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해발 3,000미터 이상에서는 여행자의 42%가량이 고산증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 도시의 고도는 해발 몇 십 미터에 불과하다.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이 해발 1,950미터, 가장 높은 빌딩인 롯데월드타워도 겨우 해발 555미터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고산증을 경험할 일이 없다. 경험치가 없으니 무지하고, 내 일이 될 거라 상상하지 못할 수밖에.


지난 며칠간의 행보는 모두 고산병을 향해 달려온 것만 같았다. 민아가 리장에 도착한 후 우리는 해발 2,440미터 수허구전에서 이틀을 묵었다. 이틀째 되는 날 유스호스텔에서 노동절 파티를 즐기며 도수 8도의 샹그릴라 맥주를 두 병씩 마셨다. 3일째 날 위룽쉐산 중턱 해발 3,100미터로 숙소를 옮겼다. 민아는 경치가 끝내준다며 펄쩍펄쩍 춤을 추고, 평소 습관대로 반나절 동안 몇 번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고산병에 안 걸리려 해도 안 걸릴 수 없는 일만 골라서 해온 꼴이었다.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


해발 3,000미터 이상 고산지대에서는 여행자의 42% 가량이 고산증을 겪는다.

겁이 많은 나는 준비가 철자한 편이다. 그래서 내 여행에선 놀라운 사건 같은 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당탕탕 좌충우돌 사건들이 벌어져야 비로소 재미난 여행기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다. 단체 여행을 가게 되면 일정을 짜고 식당과 숙박지를 예약하는 일을 맡게 될 때가 많다. 현지 도착 후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사전답사라도 다녀온 듯 모든 정보를 찾아 엑셀 표를 채우는 것이 나의 준비 방식이다. 동행자 중에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 꼭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참가자들에게 일정표를 사전 회람하는 것도 필수다. 이렇게 설계한 여행을 주변 사람들은 ‘해선투어’라 부른다. 스파르타식 일정으로 악명 높지만, 나름 높은 고객 만족도와 무사고 10년을 자랑해왔다.


그런데 고산증은 처음 만난 복병이었다. 휴직을 끝내고 회사 복귀를 앞에 둔 친구의 마지막 여행을 알차게 채워주자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날의 아찔한 경험 이후 다음 일정부터는 예상시간을 두 배 늘렸다.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동하게 된 것이다. 리장에 오면 공작부인이 되어야 한다더니, 우리는 사뿐사뿐 걷고 천천히 일어서고 고개도 한 박자 쉬고 돌리는 우아함을 강제 장착하게 되었다.


리장에서의 헤프닝을 들은 선배는 말했다.

“살면서 이런 경우 너무 많아. 좋은 거, 화려한 거, 유명한 거 좇아서 다 해보려고 하지. 욕망의 화신이 되지. 그런데 아무도 그것의 역효과, 뒷일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아.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우리는 뒤늦게 깨닫지. 육체의 병이야 약도 있고 치료도 할 수 있다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의 병은 고칠 길이 없을 때도 많아. 너의 우울증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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