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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Jan 21. 2020

중국 청년들의 배낭여행 구루

여행가 샤오펑과 5성급 유스호스텔

90년 전 식물학자 조셉 록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샹그릴라 열풍을 일으킨 이후, 리장에는 서양 백패커의 발길이 이어졌다. 90년대 말 대지진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중국인 패키지 관광객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리장은 배낭여행자의 도시다. 다만 그 주인공이 조금 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서도 배낭여행 문화가 확산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 특히 리장은 중국 청년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지역이다. 리장이 중국 청년들의 배낭여행 성지가 된 데는 중국 최초의 직업 여행가 샤오펑(小鹏)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본명 장진펑(张金鹏)보다 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중국 최초의 직업 여행가 샤오펑 (출처: 샤오펑 SNS)

대학 4학년이던 2001년 샤오펑은 유명 외국계 회사 인턴을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월급을 털어 생애 첫 배낭여행에 나섰다. 당시엔 제대로 된 가방도 없어서 한국인 동창에게 큰 배낭을 빌렸다고 한다. 스위스 칼도 하나 빌렸는데, 그저 초보 배낭여행자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용도일 뿐 딱히 사용할 일도 없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몇 년 전 여행기에서 보았던 ‘시제(西街, 서가)’. 광시(广西, 광서) 구이린(桂林, 계림) 양숴(阳朔, 양삭)에 있는 시제는 명·청 시기 구이린 북부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1,400여 년 역사의 옛 거리다. 고색창연한 이곳의 반전은 서양식 식당과 영문 간판이 많다는 것.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에 소개된 후 동양적 매력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외국인 거리’로 불린다고 한다.

 

샤오펑은 타이완 출신 사장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세계 각 국 사람들이 국적, 나이, 신분도 잊고 한데 어울려 노래하고 건배를 외치는 어느 술집 풍경을 묘사한 여행기에 이끌려 이곳을 찾았다. 낮에는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햇볕을 쬐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밤에는 술집에서 각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리장, 샹그릴라, 신장위구르, 그리고 티베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이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여행가의 꿈을 싹트게 했다. 그해 여름에는 독학으로 플래시, 드림위버, 포토샵 등을 배워 첫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메뉴는 대학, 가족, 천하, 이렇게 달랑 세 개였다. 시시콜콜한 대학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찬 대학 메뉴와 달리, 천하 메뉴에 올린 것이라곤 학창 시절 몇 차례 여행 당시 촬영한 풍경 사진이 전부였다.


샤오펑은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에서 물류 분석가와 세관 중개인으로 일한 적이 있다. 물론 때려치우는 데는 두세 달씩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업무 스트레스는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히려 무료하고 우울해서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몇 달간 돈을 벌면 또 다시 여행을 떠났다. 석사 과정을 위해 네덜란드에 체류하던 시기에도 3분의 1을 유럽 여행에 썼다. 스위스 산악열차에서 만난 프랑스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세계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다. “이봐, 딱 한 번 사는 인생,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구경해. 그래야 한 평생 허투루 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그 순간 샤오펑은 깨달았다.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또 자신의 심연을 탐험하는 것, 이게 바로 그가 원하던 인생이라는 것을.


2004년 그는 80일간의 유럽 기행을 담은 책을 출간했고, 대학원 졸업 후에는 잡지에 사진과 여행기를 기고했다. 여행을 가려고 돈을 버는 삶이 여행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삶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샤오펑은 ‘전업 여행가’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2008년 위기가 찾아왔다. 부모님의 결혼 압박이 극심했다. 그 자신도 ‘이대로 가다간 내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여행을 다녀와서 직장을 구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미얀마 루앙프라방 무앙 응오이(Muang Ngoi) 마을을 향했다.


전기도 통신도 뚫리지 않은 메콩강 하류 오지마을에서의 한 달 살기는 매일이 즐거웠다. 그러나 20일쯤 되었을 무렵 그는 지갑에서 300달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점주를 찾아가 항의를 하자, 그는 대번에 칼을 뽑아들고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샤오펑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밖에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주인이 찾아올까 두려워하며 그는 다른 객잔에 숨었다. 지붕을 뚫을 듯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샤오펑은 티베트 탕구라산(唐古拉山, 당고랍산)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해발 5000미터에서 잠을 자야했는데, 현지인이 했던 말이다. “다음날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여행자도 많아요.”


죽음의 공포 이후 그의 인생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비쳤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싱가포르에서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싱가포르 중문 잡지에 실린 그의 여행기와 사진을 눈여겨본 관계자가 관광지와 호텔을 방문 취재하는 프로그램에 그를 불렀다. 그는 이 일로 상당한 수입을 얻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관광청과도 콜라보를 진행하게 되었다. 샤오펑은 2009년 블로그를 개설하자마자 금세 파워 블로거에 등극했다.


2010년 32살이던 그는 10년간의 배낭여행 경험을 담은 책 『배낭 10년(背包十年)』을 출간해 50일 만에 5쇄를 찍는 기염을 토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10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이후 출간된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我们为什么旅行)』, 『집으로 돌아오는 길만 잊지 않으면 돼(只要不忘了回家的路)』 등 그가 쓴 배낭여행기 3부작은 중국 청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샤오펑의 ‘배낭 10년’ 3부작

진득하게 직장도 못 다니는 체제 부적응자 같아 보였던 청년이 10여 년 만에 파워블로거, 베스트셀러 작가, 7개 유스호스텔의 사장이 되었다. ‘배낭 10년의 샤오펑’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중국에서 가장 흥행한 한국책 중 하나다. 샤오펑의 배낭 3부작이 인기를 얻은 것과 비슷한 시기인 2012년, 인터넷서점 아마존 중국에서 상반기 베스트셀러 9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류가수 김재중과 중국 명문대 교수 추천 도서라는 마케팅도 주효했지만, 가장 큰 흥행 이유는 역시나 중국에도 미래를 불안해하는 청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국 청년들에게 샤오펑은 닮고 싶은 롤모델이자 멘토다.


성공의 순간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해왔다. 중국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곳곳을 한 발 앞서 탐험하며 소개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35살에는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들고 남미를 향했고, 2019년 겨울에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샤오펑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허구전에 갔던 나는 전날 그가 스페인행 비행기를 탔다는 소식을 듣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2013년 샤오펑은 리장 수허구전에 청년들의 유토피아 ‘데스티 유스 파크(Desti Youth Park, 背包十年青年公园)’를 개장했다. 세계 여행 중 묵었던 숙소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유스호스텔을 선보인 것이다. 도미토리 1인당 5천 원~1만 원의 합리적 가격, 식당·카페·세탁실 등 편리한 부대시설, 다양한 사교 활동과 소규모 여행 프로그램까지 갖춘 ‘5성급 유스호스텔’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을 포함해 현재까지 윈난성 샹그릴라, 쓰촨성 청두, 충칭 등에 문을 연 데스티 유스 파크는 20대의 샤오펑 같이 주머니가 넉넉지 않은 젊은 여행자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주고 있다.

2019년 리모델링한 데스티 유스 파크 리장 수허구전점


그가 처음 만든 데스티 유스 파크 리장 수허구전점은 중국 청년들에게 리장을 알리는 데 한몫했다. 그의 책을 읽고 이 유스호스텔에 묵기 위해 리장을 찾는 청년이 있을 정도다. 모이는 사람도 샤오펑과 똑 닮은꼴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여행 온 20대, 중국 서부 오지 탐험에 나선 30대, 낯선 땅에서 문학적 영감을 찾으려는 시인 등 내가 데스티 유스 파크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이런 청년들이었다. 유스호스텔 직원 중에는 대도시의 빡빡한 삶이 싫어 리장에 왔다가 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도 있었다. 몇 개월 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머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보니 이곳 직원은 어벤저스 급이다. 레크레이션 강사 수준의 진행 솜씨를 가진 사람부터 노래와 악기 연주, 사진 촬영, 바리스타, 요리까지 각 분야 재주꾼이 모두 모여 있다.


각종 기념일에 이곳에 묵게 된다면 보다 성대한 파티를 만날 수도 있다. 명절엔 함께 만두를 빚기도 하고, 핼러윈엔 분장 파티가 열린다. 내가 처음 묵었던 날은 중국의 중요 기념일인 5.1 노동절이었다. 무료 꼬치구미 파티가 있다고 해서 마당에 나갔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꼬치 재료를 보고 경악했다. 역시 대륙의 스케일이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데스티 유스 파크는 평시에도 활동 프로그램이 많기로 유명하다. 인원을 모아 인근 지역으로 당일 여행을 간다거나, 위롱쉐산 아랫마을 조셉 록의 위후춘까지 자전거 일주에 나서기도 한다. 저녁에는 수허구전 남쪽 광장 스팡팅인(四方听音, 사방청음)에서 나시족 전통 춤을 구경하고, 어둠이 깔리면 앞마당에서 작은 캠프파이어를 연다. 어떤 직원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어떤 직원은 네모난 의자를 작은북 삼아 리듬을 채운다. 여행자 중에서 자원해 가수로 나서는 사람도 있다. 출신, 나이,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 이때만큼은 모두 마음껏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다.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불멍’이다. 몇 분 남짓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나는 낮 시간 동안 숨어 있던 청춘의 불안이 그들의 얼굴을 스쳐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도 여름밤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스레 데스티 유스 파크에서 늦은 밤까지 들려오던 청춘의 절규가 떠오른다.


데스티 유스 파크의 레트로 감성 불멍 파티와 심야 영화 상영회
노동절 5.1절을 맞아 데스티 유스 파크에서 열린 공짜 바베큐 파티


뉴욕 생활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에서 조승연 작가는 “나와 매일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이 모두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뿌듯함”이 뉴요커의 자부심이라고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불나방처럼 뉴욕에 몰려가 청춘을 불태우고,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리장의 매력은 정반대에 있다. 제아무리 특별한 사람도 평범한 방문자로 환영받을 수 있고, 자신만의 모험을 다 마치고 나면 여전히 익명의 배낭여행객으로 홀연히 떠나갈 수 있는 방랑자의 도시니까. 사회적 명성도 무거운 직책도 복잡한 인간관계도 리장까지 따라올 순 없다. 이곳에서 청년들은 더 이상 패배자도, 도망자도, 부적응자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속도의 삶을 살아갈 뿐. 기성 사회가 말하는 성공보다는 나만의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원하는 중국 청년들. 나는 리장에서 다른 가치관의 시대를 열고 있는 세대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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