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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28. 2020

다리로 ‘기후 망명’ 갑니다

신 이민자의 천국 차이미뚜어

윈난은 중국의 ‘내부 망명지’ 같은 곳이다. 동부 연안 대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제주 이민’이 붐을 이룬 것과 비슷하다.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 많은 직장 생활을 거부하며 윈난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 ‘지우링허우(90后)’라 불리는 9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수입이 적더라도 생활이 자유로운 업종에 종사하며, 이곳에서 느린 리듬으로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간다. 윈난은 인생의 쓴 맛을 본 중년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업 실패, 가정 파탄, 수만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 어떤 사람은 장기 체류, 어떤 사람은 단기 여행을 하며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특징적인 집단은 맑은 공기, 깨끗한 자연, 온화한 기후 같이 생태적 가치를 따라 윈난에 온 사람들이다. 이들 ‘신 이민자’의 이주는 2000년대 들어 두드러진 현상이다. 우리나라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중국의 스모그와 무관하지 않다.


때 이른 기습한파가 불어 닥친 10월 말, 베이징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잿빛 도시였다. 국제회의가 개최된 전날의 파란 하늘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격변이었다. 스모그의 원인은 일찍 시작된 난방이다. 중앙난방이 이뤄지는 아파트와 대형 건물은 물론 공장과 단독주택까지, 중국의 난방을 책임지는 연료는 바로 석탄이다. 매년 11월이면 중국 중북부 지역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수치가 치솟고, 극심한 스모그와의 전쟁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다. 


중국 정부는 주요 도시의 난방 원료를 천연가스나 전기로 대체해 공기 질을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가스 공급이 쉽지 않은 도시 외곽과 농촌 지역에서는 여전히 매연저감 장치도 없는 소형 석탄 난로가 사용된다고 한다. 전 세계 3위의 석탄 매장량, 1위의 석탄 생산량을 기록하는 자원강국 중국의 그림자다.


2010년 베이징에서 흰 셔츠를 입고 외출하면 반나절도 안 돼 옷이 누렇게 변했다. 당시 알게 된 두 친구를 몇 년 후 다시 만났을 때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엔지니어 라오왕은 나를 보러 나오면서 단행본 크기만 한 휴대용 미세먼지 측정기를 가져왔다. 루쉰 박물관에 가는 길에도 수시로 수치를 확인하며 공기가 나쁜 곳을 빨리 뜨자고 나를 재촉했다. 글을 쓰는 세강이는 한술 더 떠 이주할 지역을 알아본다며 전국을 답사하고 다녔다. 출판사와 13권을 출간하기로 전속 계약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일을 해야지 어딜 가냐고 핀잔을 주었더니 “공기 좋고 도서관만 있으면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 다시 연락이 닿아 정착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고향 네이멍구(内蒙古, 내몽고)로 돌아갔다고 한다.


중국 동북부 지역의 오염된 공기는 겨울철 계절풍인 북서풍을 타고 우리나라 수도권 상공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공기오염으로 산소 호흡기를 쓰지 않고 나다닐 수 없는 세상이 올 것만 같다. 그럼 오픈카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물건이 되지 않을까?

“내가 22살에 말이지, 뚜껑 없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레돈도 비치를 달려 멕시칸 음식을 먹으러 갔었어. 마른 빨래같이 습기 하나 없는 바삭한 햇볕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기분 좋은 찬바람이 부는 늦겨울이었지.”

어쩌면 할머니가 된 내가 어린 손주에게 이런 얘길 들려주면,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까?


리장의 하늘과 물


국토를 이사할 수 없는 한국은 미세먼지 퇴치를 위해 중국이 펼치는 ‘푸른 하늘 보위전(蓝天保卫战)’ 정책이 성과를 거두길 기원해야 할 형편이다. 오히려 중국인은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청정지역으로 내부 이민을 떠날 수 있다. 윈난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2019년 리장 시내 곳곳에서는 부동산 개발이 한창이었다. 관광객을 위한 대형 리조트 건설 현장도 있지만, 고급 타운하우스 단지도 여럿이었다. 이렇게 많은 집을 도대체 누가 살까 궁금하던 찰나, 버스정류장과 가로기에 걸린 분양 광고가 눈에 띄었다.

‘우주의 별을 나의 정원으로’.

마케팅 대상과 홍보 포인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기 맑고 산세 좋은 리장으로 이주하거나, 한적한 청정도시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외지인을 겨냥한 것이다. 친환경 생태 도시로서의 경쟁력을 깨달은 지역 정부의 정책 방향은 대중교통에서도 느껴졌다. 리장 시내를 오가는 노선버스는 기본적으로 모두 전기차다. '문명 도시, 환경보호 시범 도시' 건설의 일환으로 최근 몇 년간 추진한 대중교통 차량 교체의 결과다. 


다리의 창산 케이블카를 타러 올라가는 길, 공사장 가림벽에는 ‘녹수청산이 금산은산’이라는 시진핑 주석의 발언과 ‘개발 중의 보호, 보호 중의 개발’이라는 표어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맑은 물과 푸른 산이 귀중한 자산이라며 환경 보호 병행 개발을 강조한 이 글귀는 윈난성의 발전 전략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슬로건이었다.


다리구청의 정문인 오화루

     

신 이민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차이미뚜어


리장 보다 남쪽에 있어 겨울 날씨가 따뜻한 다리는 ‘기후 망명’을 온 신 이민자의 천국이다. 도시 문명과 고급문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신 이민자의 라이프 스타일은 '차이미뚜어(柴米多)'로 대표된다.


2005년 장쑤성 출신의 25살 배낭여행객 지아밍(嘉明)은 윈난성 다리에 정착했다. 2007년 다리 쐉랑(双廊)에 최초의 객잔을 열어 큰 성공을 거뒀지만, 2012년 관광객이 폭증하면서 번잡한 쐉랑을 떠나 다리구청(大理古城, 대리고성)으로 옮겨왔다. 그는 이때부터 건강한 식재료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장에서 밥상까지’를 모토로 식당도 개업했다. 회사 이름은 차이미뚜어(柴米多)라고 지었다. 땔감이 많고(柴多) 쌀이 많으니(米多) 생활의 기본이 풍성하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는 우리나라 ‘마르쉐’ 같은 장터를 만들고, 다리구청 외곽에 1만8천 평 가량의 토지를 임대해 농장도 만들었다. 이곳에 농작물을 심고 젖소와 닭도 기르면서, 주변 습지까지 자연환경이 복원돼 야생조류도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농장에서 길러낸 식재료는 시내에 있는 차이미뚜어 식당에서 건강한 음식으로 탈바꿈해 관광객들을 만나고 있다.


차이미뚜어 장터는 매주 토요일 고성 내 식당에서 열리는 먹거리 장터와 한 달에 한 번 농장에서 열리는 생활장터로 나뉜다. 특히 생활장터에서는 음식과 수공예품 판매는 물론 공연과 다양한 테마 행사도 함께 열린다.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지아밍과 같이 외부 도시에서 온 신 이민자가 많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도 있다. 히피 스타일, 자유롭고 개성 있는 차림새가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유난히 아이들과 반려견이 많이 보이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처음 다리를 찾았던 4월 마지막 주, 생활장터 테마는 ‘채식’이었다. 다리의 비건 식당이 모두 모였다. 할머니의 비법 간장과 식초에 고추양념을 곁들인 빈촨식 채식 비빔국수(宾川素凉米线)는 기대 이상의 놀라운 맛이었다. 디저트로 초콜릿 케이크와 주스까지 사서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연 음악가이자 수공 악기 제작자 아지앤(阿坚) 선생의 신비로운 연주까지 듣고 있으니 이곳이 천국인가 싶다.  



제법 공기가 쌀쌀해진 11월 마지막 주, 차이미뚜어 농장에서는 고구마 캐기 체험이 진행되었다. 위챗에 뜬 공지를 보고 신청을 한 팀이 자그마치 40여 개. 대부분은 가족이었다. 흙을 밟고 자연을 느끼게 해주려는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농장을 찾았다. 아이들 틈에 끼어 나도 대나무 바구니를 둘러매고 줄 지어 자색 고구마 밭을 향했다. 한창 성장 중인 작물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밭이랑을 지났다. 잡초 더미를 헤치고 흙길을 걸어 호숫가에 도착하면, 삐걱대는 통나무 다리를 세 개나 건너야 한다. 고구마 밭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만큼은 아이도 어른도 인디아나 존스가 되었다. 미지의 땅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가가 되는 것이다.



무성한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삽을 깊이 넣어 땅 속에 숨은 고구마를 캐는 일은 아이들 몫이다. 경쟁적으로 큰 것을 쓸어 담는 어린 농부의 활약상을 카메라에 담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고구마로 가득 찬 대나무 바구니를 메고 생활장터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뒷모습마저 당당했다.


중국을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라고들 한다. 중국인은 경제적 득실을 따지고 이문을 남기는 데 능하며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동네 식당에 가도 한 편에 재물신 관우상을 모신 곳이 많다. 가장 좋아하는 숫자도 ‘부자가 된다, 발전한다’는 뜻의 글자 发(fa)와 발음이 비슷한 숫자 8(ba)이다. 쇼핑몰은 88위안, 888위안 같이 8로 끝나는 가격 마케팅을 한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분 8초에 시작했을 정도다. 전화번호와 자동차 번호판도 8자 연번은 억 소리 나는 고가에 거래된다. 이렇게 돈만을 쫓는다면 상하이, 베이징, 선전, 항저우 같은 경제도시에서 성공을 도모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러나 점차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경제 발전에서 소외되고 인프라도 낙후된 서부 내륙으로 삶의 기반을 옮겨온 이상한 사람들. 윈난에는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 차이미뚜어에서 만난 다리의 신 이민자들은 ‘건강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치 있는 삶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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