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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Mar 23. 2020

리장은 어떻게 ‘썸 타는 도시’가 되었나

옥룡제3국과 일미양광

이뤄질 수 없는 운명, 죽음이라는 결말,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오랜 세월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리장에도 이에 못지 않은 시대를 앞서간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썸 타는 도시’의 기원이 된 나시족 전설 ‘옥룡제3국(玉龙第三国)’이다.


동바경 속 대표적 문학 작품 ‘루반루라오(鲁般鲁饶)’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청춘남녀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다. 주인공 카이메이쥬미진(开美久咪金)과 주쿠위레이파이(朱古羽勒排)는 고산 목장에서 일하며 사랑에 빠졌지만, 가족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자가 부모에게 잡혀간 후에야 여자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연락을 시도하지만 돌아온 것은 부모의 독설뿐이었다. 여자는 절망 속에 목을 매 자살한다. 뒤늦게 돌아온 남자는 그녀의 시신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위룽쉐산 속 어딘가에 있다는 죽은 연인들의 낙원으로 가 못다 한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나시어로 ‘우루요우취거(舞鲁游翠阁)’라 불리는 그곳은 흰 구름이 휘감고 있는 산속 왕국이다.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은 비단,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과일과 술, 우유가 있는 천국이다. 은 뿔 꽃사슴이 밭을 갈고, 꽃 꼬리를 단 금계가 새벽을 알리는 곳에서 붉은 호랑이를 타고 큰 귀 여우를 사냥개 삼아 살아간다. 민간에 전해오는 ‘요우베이티아오(游悲调)’에는 파리와 모기가 사는 제1국, 풀조차 없는 제2국과 달리, 초목이 우거지고 동물이 살며 맑은 물이 흐르는 ‘옥룡제3국’으로 표현된다.


저기 어딘가에 옥룡제3국이 있을까요?


전설에 따르면 위룽쉐산에는 사랑의 신 한 쌍이 살고 있다. 이들은 입으로 활을 쏘고 대나무 피리를 불면서, 무수한 금수를 거느리고 바람과 구름 가운데서 비탄에 빠진 연인들을 끊임없이 부른다고 한다. 리장 숙소에선 설산이 보이는 마운틴뷰 객실의 가격이 비싸다. 본전을 뽑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산을 보며 멍 때리는 내게 현지인은 겁을 주며 말했다.

“설산을 너무 보다가 영혼을 빼앗기는 수가 있어.”

실연당한 사람이었다면 두 신의 부름에 홀려 옥룡제3국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상리장 공연에서 많은 관객이 가장 울컥했다고 꼽는 장면이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이 함께 어딘가로 떠나자, 남동생이 “누이! 가지 마!”라고 목 놓아 울부짖는 대목이다. 이게 바로 옥룡제3국 이야기다. 


이런 일이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애 과정에서 장애물을 만난 나시족 청춘남녀는 실제로 동반 자살을 택하곤 했다. 세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사랑의 낙원에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자살하는 연인이 많았다. 여러 쌍이 한꺼번에 목을 매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리장에선 워낙 유명하고 공공연한 일이다 보니 나시족 청년 아푸아차이는 농담까지 했다. 

“좋다는 애들을 자꾸 갈라놓으니까, 다들 죽어버려서 우리 나시족이 소수민족이 된 거야.”

옥룡제3국 이야기를 다룬 인상리장 3부


위룽쉐산 어딘가에 입구가 있고,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표현되는 옥룡제3국은 사후 세계라기보다 ‘평행세계’처럼 느껴진다. 후대 사람들은 설산 기슭의 넓은 들판 윈산핑(云杉坪, 운삼평)을 전설 속 낙원으로 가는 창이라며 낭만적 관광지로 포장해 홍보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문학적 비유를 한 전설도 있다. 구름으로 뒤덮인 위룽쉐산 계곡엔 햇볕이 들기 쉽지 않은데, 해와 달이 만나는 추분에 내리쬐는 한줄기 햇살을 연인이 함께 받으면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모티브로 제작된 중국 드라마도 있다. 지금은 스타가 된 쑨리(孙俪, 손려), 허룬둥(何润东, 하윤동)의 풋풋한 시절을 볼 수 있는 일미양광(一米阳光, 2003)이다. 


회사 사장과 불륜관계에 있던 변호사 쑨리는 자신을 신임하던 그룹 총수까지 배신하고 사장을 돕는다. 하지만 자신은 이용당했고 끝까지 내연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이 무렵 나타난 순수한 총각 허룬둥이 그녀를 위로하며 구애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난 곳이 바로 리장이다. 고성을 배경으로 달달한 데이트 장면이 전파를 타며 많은 시청자가 리장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리장고성엔 일미양광이란 이름의 객잔과 클럽이 있다.


30부작 중국 드라마 일미양광(2003)

옥룡제3국 전설과 드라마 일미양광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사랑을 갈망하며, 혹은 실연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리장에 오기 시작했다. 관광업이 발달하면서 너도나도 리장에 모여들어 만남의 기회는 더 많아졌다. 예능 프로그램 <배틀트립>에서 중국인 가수 차오루는 리장을 “썸 타는 도시. 혼자 가서 둘이 오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낭만적 연애를 꿈꾸며 리장을 찾는 젊은이가 많기 때문이다. 


수허구전에서 같은 유스호스텔에 묵던 2030 중국 여성 8명과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갖은 요리가 올라오는 중국식 식탁 위의 진정한 주 메뉴는 다름 아닌 연애였다. 

“어제 캠프파이어 때 노래 부른 그 애 어때?”

“귀엽더라. 노래도 잘하고. 근데 너보다 어려 보이던데?”

“넌 어제 샤오황이랑 한참 얘기하더라. 다정해 보이던걸?”

“그럼 뭐해. 애프터가 없는데. 아휴 답답해.”

“네가 괜찮다던 흰 옷 입은 걔는 오늘 안 보이더라.”

“어제 루구후 갔대. 아까 오는 길이라고 하던데, 오늘 저녁엔 볼 수 있으려나?”

“젊은 애들 많다고 해서 왔는데, 이번엔 폭망이야!”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그녀들의 전투적 연애 수다를 들으며, ‘썸 타는 도시’ 리장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운명의 사랑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국제 행사 때마다 지역 정부가 한국인 대표로 부른다는 리장의 유명인사 팅팅 언니. 그녀는 고성 식당에서 친구를 따라 여행 온 황쉐프를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인이라 반갑게 대화를 나누다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문가 수준의 등산 경력을 가졌다는 것.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이 윈난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이동한 루트를 재발굴하고 싶다”는 팅팅 언니의 포부에 황쉐프는 그만 반하고 말았다.


조셉 록이 윈난에 체류하던 시기, 티베트는 외부 세계와 교류가 전혀 없었고 지배국 영국의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외국인 접근이 쉽지 않았다. 여행가이자 문화인류학자였던 다비드 넬은 10여 년에 걸쳐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티베트 라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경계를 뚫기 위해 순례 중인 티베트인 할머니 행세를 하며 3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전설적 여성 탐험가가 100년 후 리장에서 한국인 남녀를 인연으로 맺어준 셈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한중 커플이다. 내게 리장을 추천해준 지우 언니의 러브스토리는 바이샤에서 유명했다. 처음 묵었던 객잔의 사장 부부는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동네에도 중국인과 만나는 한국인 여성이 있어요. 술 먹고 고백을 했다는데,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도 아직 얼굴은 못 봤어요.”

알고 보니 지우 언니 얘기였다. 바이샤에는 정말 비밀이 없는 모양이다. 


이 커플의 탄생에는 언니의 절친이 큐피드 역할을 했다. 바이샤 동네책방에서 주인 닝꺼를 보는 순간, 친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우 언니는 그렇게 멋모르고 리장에 갔다 50평생을 기다린 인연을 만났다. 서점 주인과 출판 편집자의 만남이니 관심사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언어의 장벽이 있기는 했지만 ‘지식분자’끼리는 말이 잘도 통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신묘한 일이 일어났다. 언니는 처음 리장에 다녀 온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비행기 표를 끊어서, 촉 좋은 후배로부터 ‘꿀단지를 묻어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계획 없던 나의 리장 한 달 살기에서 유일하게 정해진 과제는 전설 속 인물 닝꺼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뒤늦게 리장에 합류한 친구와 나, 그리고 닝꺼가 지우 언니도 없이 고성 근처 스타벅스에서 어색한 삼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애인을 동생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연결은 해주었지만, 언니는 내심 걱정이 컸다고 한다. 하필 후배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제일가는 두 명인지라 닝꺼를 어떻게 평가할지 긴장 속에 소식을 기다렸다나. 그러나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인사 몇 마디를 나누며 언니 이름을 언급하는데 그의 눈이 수줍게 ‘반짝’ 빛났다. 50대 자연인의 얼굴에서 꿀 떨어지는 표정을 보는 순간, 친구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동시에 외쳤다. 

‘합격!’


80일간의 윈난 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내게 언니는 여행 중에 괜찮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냐고 물었다. 손사래를 치며 인사치레로 한 마디 했다.

“닝꺼 만한 사람 찾기가 어디 쉽나요.”

“미안하다. 내가 최고의 남자를 만나버려서 쓸 만한 사람이 안 남았구나.”

언니는 한 술 더 뜬 닭살멘트로 모두의 원성을 사고 말았다.


리장고성의 밤 거리

물론 모두가 이런 진지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리장은 만나기 좋고, 다리는 사랑하기 좋고, 라싸는 힐링하기 좋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중국 누리꾼 사이에 떠도는 말이다. 단순하게는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기 좋은 곳이라는 말 같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불륜 혹은 원나잇 스탠드 하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란다.


리장고성 다옌구전에서 나를 가장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은 클럽 거리였다. 수백 년 역사의 단아한 건축물에 어둠이 내리면 고성은 전혀 다른 얼굴의 환락가로 변한다. 클럽 거리는 북새통을 이룬다. 라이브 공연과 EDM 음악이 골목 밖으로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야한 차림의 댄서가 퇴폐적인 몸짓으로 리듬을 타며,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관광객의 혼을 빼놓는다. 클럽에 입장할 필요도 없다. 이 모든 장면은 투명한 창문을 통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의 일탈은 바로 이 클럽에서 시작된다고들 한다.


이런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다옌구전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교통이 좋은 번화가에 숙소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밤새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잠을 설치고는 다음날 아침 바로 짐을 싸 도망 가버린다. 그들은 한 결 같이 고성이 타락했다고 한탄한다.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도시. 그런 리장은 어쩌다 인스턴트 시대의 사랑을 대표하는 도시가 되고 만 것일까? 리장에는 이렇게 낭만적 정취를 예찬하는 목소리와 지나친 상업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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