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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Jan 29. 2020

결혼 없는 나라에도 순애보는 있다

모계 가모장 사회 루구후의 모쒀인 로맨티시스트

다롄 부부를 따라 우연히 머물게 된 객잔은 공교롭게도 리장시 성급 모쒀 문화 전승자 즐바얼처(直巴尔车) 선생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70살이 다 되어가는 그는 청년의 목소리를 가진 활력 넘치는 할아버지다. 『모쒀 풍속 해설(解读摩梭风情)』의 저자이자, 「루구호의 미」 등 여러 편의 모쒀 전통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예인이기도 하다. 루구후에 오면 많은 관광객이 저녁 전통 공연을 관람하는데, 즐바얼처 선생은 출연진의 노래와 춤도 지도한다고 했다.


즐바얼처 선생(왼쪽)과 그의 저서 ‘모쒀 풍속 해설’(오른쪽)


며느리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사회


객잔 입구에는 즐바얼처 선생의 어머니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위대한 영도자'의 존영도 아니고 어머니 사진이라니! 너무 마마보이 아닙니까?!”

농담으로 던진 말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모쒀 남성은 마마보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어요. 평생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 말씀을 따르거든요.”

모쒀인은 어머니를 숭상하고 여성을 존중하는(崇母尊女) 모계 가모장 전통을 갖고 있다. 연장자 여성인 할머니가 가장(家長). 할머니가 낳은 자식은 남녀불문  집에 함께 산다. 당연히 딸들이 낳은 자식도 함께다. ‘시집  며느리 없다. 경제 공동체이자 양육 공동체인 가족의 구성원은 모두 모계혈족이다. 가정의 중심도 여자다. 농사며 집안일까지 가정을 돌보는 일을 여자가 도맡지만, 재산도 모계 상속된다. 할머니의 남자 형제나 아들, 외손자는 이를 보조하고   활동을 맡는 노동력이다.


그들은 결혼 대신 쩌우훈(走婚, 주혼)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루구후의 모쒀인을 유명하게 만든 제도다. 남녀가 데이트는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여성의 가정에 귀속되며,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양육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라는 호칭 없이, 아샤와 아주라고 부른다. 남자는 밤에만 애인의 집에 가 사랑을 나누고 새벽이 되기 전에 어머니 집으로 돌아온다. 여성은 자신의 방 문 옆에 상대방의 물건을 걸어놓는 것을 신호로 언제든 연인관계를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다른 연인을 찾는다. 한 여성이 낳은 자녀들의 아버지도 제각각일 수 있다. 물론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 그들에겐 아버지라는 개념도 호칭도 없다. 외삼촌은 있지만 ‘아버지가 없는 나라’다.

가모장의 방에 앉아 손님에게 수유차를 대접하는 모쒀인 할머니
모쒀 전통 가옥에서 딸들이 머무는 화로(花楼), 모계 육아공동체답게 여동생의 아기를 업고 있는 모쒀족 여성


콩가루 족보? ‘쩌우훈’에 대한 오해


일부일처제 결혼이라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독특한 문화는 외국인은 물론 중국 내 다른 민족 사람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성적인 자유’로 단순화되어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한다. “서로에게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야?”, “문란한 제도 같아. 콩가루 족보 되겠는데?” 이렇게 말하는 중국인도 있다. 실제로 문화대혁명 시기 이곳에 들이닥친 홍위병은 ‘미개한 풍습’을 개혁해야 한다며 모쒀인 사회를 풍비박산 냈다고 한다.


루구후에 가면 수성양화(水性楊花)라는 꽃이 수면에 떠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얀색 얇은 꽃잎이 하늘하늘 아름답고, 줄기는 요리 재료로도 쓰는 식용 식물이다. 하지만 현지 여성을 칭찬한답시고 수성양화 같다고 말했다간 뺨을 맞을 수도 있다. 물에 흔들리며 떠 있는 모습을 연애 상대를 쉽게 바꾸는 사람에 빗대, 모쒀족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쓰인다고 하니 말이다.


루구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수성양화(水性楊花), 줄기는 요리 재료로 쓰인다. 물에 흔들리며 떠 있는 꽃에 빗대 연애 상대를 쉽게 바꾸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도 쓰인다고.


루구후에서 직접 모쒀인을 만나 바깥세상의 편견들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의문이 풀렸다. 자극적으로 부풀려진 몇 가지 이야기만 듣고 많은 부분을 오해했던 것이다.


젊었을 때 서로를 알기 위해 파트너를 몇 사람 만나보는 것을 제외하면, 모쒀인 80% 정도는 기본적으로 고정된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실제 모쒀인 전통가옥을 구경 갔을 때 일이다. 60대 남성이 집안일을 도우며 방문객에게 집안 살림과 관습을 설명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가 가장인 할머니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이 집 둘째 딸의 아주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위인 셈이다. 이미 오래된 공개적 관계이기 때문에, 낮에는 연인의 집에 와서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멋모르고 여기 사는지 물었더니, 자기 집은 따로 있다면서 바로 옆집을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법적 혼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대충 누가 누구와 연인 관계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의 아주의 가족, 외삼촌의 아샤의 자녀, 어머니의 아주의 가족 같이 사실상 혈연관계일 것으로 예상되는 상대와는 교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쒀인은 남녀가 서로를 법으로 속박하지 않으면서도 애정과 책임감으로 그들만의 사랑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득 린뚸뚸 언니와 민 회장이 떠올랐다. 사랑이 식어버린 혼인관계를 지속하는 고통, 이혼에 대한 두려움, 이혼 후의 차별적 시선, 모쒀인에겐 존재할 수 없는 일들이다. 우리나라 미혼 여성은 ‘결혼 후 형성되는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결혼 기피 이유로 꼽는다. 모쒀인이라면 ‘며느라기’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연인 간 사랑과 경제·양육 공동체인 가정이 분리된 ‘결혼 없는 사회’. 모쒀인의 쩌우훈은 한 여성이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오래된 지혜처럼 느껴졌다.


즐바얼처 선생은 차비로 몇 십 위안을 받고 이틀간 숙박객 다섯 명의 기사 겸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그는 원시적 형태의 모쒀 가옥이 남아있는 부락을 보고 싶어 하는 우리를 자신의 고향마을로 안내했다. 일행을 태운 자동차는 모쒀인의 어머니 산 거무여신산(格姆女神山)을 향해 달려가고, 길가에는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모쒀인은 이곳에서 주로 옥수수, 고원 홍미 등을 재배한다고 한다. 소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추수를 마친 늦가을 들녘은 한국의 농촌 풍경과 다를 바 없이 한산했다. 그는 차를 몰며 모쒀인의 쩌우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떻게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모쒀인 남녀가 주로 눈이 맞게 되는 저녁 모닥불 파티(篝火晚会)


모쒀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18세쯤부터 쩌우훈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다른 모계 혈연의 남녀는 일터나 축제 등에서 서로 눈이 맞으면 만날 시간과 암호를 약속한다. 남성이 여성이 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는 문 앞에 자신의 물품을 벗어놓음으로써 안에 남자가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른 놈은 얼씬거리지 말라는 의미다. 남성은 평소 마음에 든 여성을 배에 태워 세레나데를 부르기도 한다. 노래를 궁금해 하는 우리를 위해 즐바얼처 선생은 예인답게 왕년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가늘게 내지르는 고음은 마치 피리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절로 감탄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풀이 우거져 이름도 초해(草海)인 루구후 동남쪽 지역은 배를 타고 호수를 구경하기 좋다. 세레나데가 절로 나올 풍경.

 

문화대혁명도 막지 못한 모쒀 로맨티시스트의 순애보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엄마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노래를 듣거나 춤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금세 집중해 어머니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12살에는 직접 얼후(二胡, 한국의 해금과 비슷한 중국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유차 제조용 나무통을 훔쳐 얼후 금통을 만드는 바람에 어머니께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차 얼후 연주와 전통 노래를 부르는 법도 익히게 되었다. 17살 되던 1970년 그는 당의 부름을 받고 입대를 하게 되었다.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인정받는 기회였지만, 교제를 시작한 지 3달밖에 안 된 사랑하는 아샤를 떠나 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1976년 제대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제는 행복한 나날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이 연인을 또다시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아샤의 집이 부농으로 인민의 타도 대상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런 비상시국에 개혁해야 할 풍습인 쩌우훈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 안 가 마을 민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당은 즐바얼처에게 관계를 끊고 세계관을 바꾸라며 엄중한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 낭만적 예술가는 도저히 그녀와 헤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이 말하는 그 결혼이라는 것을 하자.’

큰 결심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러 갔지만 거기서도 모욕을 당했다.

“등기는 무슨 등기! 너는 당원이고 저 여자는 부농이야. 양과 늑대가 어떻게 같이 어울릴 수 있겠어. 안되니까 혼인신고는 얘기도 말아. 계속 쩌우훈을 했다가는 당적에서 파버리겠어!”

가련한 연인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잘 못 한 게 없어. 혼인은 자유지. 우리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안 하지만, 너는 나를 따라오고, 네가 가는 곳에 내가 가면 돼.”

그는 아샤를 다독였다. 다행히 이후 당 조직은 더 이상 두 사람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연인이 떠나버릴까 걱정되었던 그는 모쒀인 전통에 없는 행동을 감행했다. 아샤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며느리의 삶은 고달픈 걸까? 대가족 시댁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아샤가 손을 들었다.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모쒀인 전통에 없는 분가를 어머니께 의논했다.

“비록 몸은 어머니 집을 나가서 그녀와 함께 살지만, 변함없이 이 집안 아들로서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굳은 약속을 하고 그는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렇게 갖은 역경을 이겨낸 두 사람은 반세기 가까이 행복하게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모쒀 연인의 데이트코스 쩌우훈교(走婚桥)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중국인 관광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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