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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14. 2020

아름다운 순간은 삽시간에 사라진다

사진 맛집 윈난에서 깨달은 것들

윈난은 똑딱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작품 사진이 나오는 곳이다. 스마트 폰으로 무심히 찍은 사진도 얼마나 잘 나오는지, 먼저 리장에 다녀온 선배는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나도 갔던 곳인데, 사진으로 보니 어쩐지 더 좋아 보여. 해선이 간 곳과 내가 간 곳이 다른 거야?”


윈난은 광활한 자연과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배경으로 세팅되어 있고 백만 불짜리 자연광 조명이 구비된 궁극의 사진 맛집이다. 그래서 수많은 신혼부부가 웨딩촬영을 위해 중국 전역에서 이곳을 찾아온다. 시골 마을에 가도 사진 스튜디오가 있고, 사진사를 대동한 커플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기도 하지만, 다양한 소수민족 전통 의상을 입고 사극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해 촬영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웨딩촬영을 해?’ 촬영팀에 길을 비켜주면서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친구와 선배들의 웨딩앨범을 떠올려보곤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연예인 커플이 촬영한 곳이래, 이 집이 요즘 핫한 곳이라고 하더라.’ 웨딩촬영은 이렇게 유행을 탄다. 시즌마다 잘 나가는 스튜디오가 있어서, 비슷한 시기 결혼한 친구들의 웨딩사진은 같은 배경과 같은 포즈 일색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예식장에서 속성으로 해치우는 결혼식도 끔찍한데, 웨딩사진마저 얼굴만 바꿔 끼우는 식이라니 상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어! 오히려 이런 곳에 와서 멋진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야외 촬영을 하는 것도 개성 있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엔 비슷한 웨딩사진이 많지 않을 거 아냐.”

내 말을 들은 친구가 이 때다 싶어 한 마디 거들었다.

“잘 생각했어. 그럼 이참에 촬영을 하고 가자!”

“뭐? 신랑도 없이?”

“생각해봐. 웨딩사진의 주인공은 신부야. 앨범 속 80%가 신부지. 촬영 때도 신부가 잘 나오게 세팅해서 여러 컷 찍고, 마지막에 ‘신랑 잠시 와보세요’해서 한 컷 찍잖아. 신랑은 액세서리지. 야외 촬영 때도 신부 짐 들어주는 게 신랑의 주 역할이야. 그러니까 신부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미리 찍자. 신랑 생기면 그때 몇 컷 합성하면 되지.”

잠시 당황했던 나는 친구의 블랙 유머에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 어쩌면 우리는 그 시절을 붙잡고 싶어 셔터를 눌러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조금산, 그 찰나의 황홀


아름다운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제주의 자연을 기록하는 데 생명을 바친 사진가 김영갑의 포토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가장 좋아는 문장이 있다.

사진은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이다.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특히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다.”


시간과 자연의 신비를 엿본 사람만이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삶의 철학처럼 느껴진다. 


이 구절의 느낌을 가장 잘 깨닫게 해 준 것은 바로 윈난에서 만난 ‘일조금산(日照金山)’이었다. 위룽쉐산의 일출은 차가운 설산을 뜨거운 쇳덩이로 바꾸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새벽 5시 50분, 고산증으로 새벽에야 겨우 잠든 친구가 깰까 봐 서둘러 알람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커튼을 젖혔다. 도심의 불빛이 닿지 않는 산속, 호텔 단지에는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날씨를 가늠하기 어렵다. 까치발로 욕실에 가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고산지대의 아침 공기가 차가울 테니 두툼한 외투로 중무장을 해야 한다. 


타임랩스 영상을 찍을 스마트폰을 테라스에 설치해두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 방을 나섰다. 휴대전화 손전등을 발밑에 비추며 본관 건물을 지나 긴 복도를 통과해 요가실을 향했다. 시야가 탁 트인 건물 정면으로 위롱쉐산이 보이고, 수공간에 설산이 비쳐 가장 아름다운 일조금산을 촬영할 수 있다는 장소다.



설산이 보이는 해발 3,100미터 고산지대는 5월에도 겨울이다. 난방이 꺼진 요가실에서 추위를 쫓기 위해 강제 체조를 하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모두들 침대 속에서 게으름을 부리는지 오늘 아침 일조금산은 나의 독차지다. 검붉은 빛으로 시작해 주황색을 거쳐 황금색으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홀로 바라보는 설산의 변화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해가 떠서 산머리에 비치는 아주 짧은 5분여의 시간 동안만 볼 수 있는 황금색 설산. 용광로에 한껏 달궈진 쇳덩이 같은 모습에 보는 사람의 가슴도 함께 뜨거워졌다. 아름다운 밤하늘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지만, 불타는 설산은 그 누구도 떠올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 '삽시간의 황홀'이었다.



8시가 가까워서야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온 사람들은 황금색에서 크림색으로 옅어진 옥룡설산을 사진으로 담으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절정의 순간을 유일하게 목격한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일조금산은 이미 지나갔답니다.’ 일조금산의 색깔은 날씨나 기온, 계절 등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과 완전히 똑같은 일조금산은 앞으로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다. 10월에 다시 찾은 리장에서도 그날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볼 수는 없었다. 2019년 5월 어느 날,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었다.


사람은 외로워하는 존재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고 싶어 비슷한 생각,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단체에 가입하기도 한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영에 가담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다. 그 고독을 견뎌내는 일이 쉽지 않기에 결국엔 모두들 어딘가로 투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며 진영논리에 투항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홀로 일조금산을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절대 고독 속에서 만난 희열이 나를 조금은 위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줄서기를 종용받지 않고, 침묵할 자유도 존중 되는 사회, 조금 다른 생각을 해도 조금 다른 삶을 살아도 괜찮은 사회가 될 때까지 외로움을 버텨볼 힘을 나는 그 곳에서 얻었다.


일출이 비쳐 노랗게 물들어가는 일조금산 위에 떠 있는 하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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