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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Oct 14. 2022

교통경찰관으로부터 해방되다

  아프리카에서 누군가가 운전해주는 개인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초록으로 물든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깨끗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노라면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버스를 타면 이야기가 달려졌다. 버스 뒤편의 어딘가에서 들리는 꼬꼬댁 울음소리가 내 귀청을 때렸다. 닭의 구슬픈 목소리에 신경을 쓰다 보면 어느 사이에 하나둘씩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쳐야 했다. 결국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사람들 속에 내가 맡았던 자리도 누군가의 차지가 되었다. 내 자리는 이미 온데간데없고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는 구석진 틈으로 밀려났다. 운수 없는 날에는 그마저도 어느샌가 내 무릎 위에 앉혀진 낯선 꼬마의 부모 노릇을 대신했다.


  마을버스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길을 지나갈 때면 정수리가 버스 천장에 부딪혀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내부는 금세 희뿌연 모래 먼지로 가득 찼다. 내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의 빈틈을 통해 들어오는 모래 먼지가 아니었다. 차량 바닥은 주먹만 한 크기로 찢긴 채 도로 위에 쌓인 먼지를 빨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승객들은 불편한 좌석에 고개를 기대어 아무 일 없다는 듯 잠을 청했다.

시골 마을을 다니는 버스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경험은 마을버스가 갑자기 멈췄던 일이었다. 버스가 주유소에서 들러 기름을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버스 안내원이 상황을 살펴보더니 버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몇몇 승객에게 다급한 수신호를 보냈다. 멈춰버린 버스를 뒤에서 밀어줄 건장한 남자 승객을 불러 모았던 것이었다.


  젊은 청년 두 명이 버스 안내원의 수신호를 받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 상황을 애써 모른 척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직감했기에 이방인으로서 특권을 누려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나이 든 어르신과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결국 버스 안내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정확히 버스 뒤편을 가리키며 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의 남자들이 ‘하나, 둘, 셋’ 안내원의 구령에 맞춰 버스를 힘차게 밀었다. 버스가 앞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운전기사는 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버스는 부르릉 소리와 함께 오르막길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라서 그런지 버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버스 안내원은 재빨리 버스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나와 다른 남자 승객들은 버스 뒤꽁무니를 쫓아가기 바빴다. 버스가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그 찰나에 두 명의 남자들이 지붕에 고정된 선반 캐리어를 잡고 차 뒤편에 올라탔다. 나도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 버스 뒤쪽의 브레이크등 옆에 있는 틈새 공간에 발을 걸쳤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딛다가 달리는 버스에서 나자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버스 기사는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10여 분간 버스 밖에 매달려 갔다. 나는 행여라도 떨어질까 두려워서 젖 멎던 힘을 다해 버스의 루프레일을 움켜잡았다.


  이런 대중교통 이용 경험도 자가운전 경험에 비해서는 소소한 일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일하다 보면 사업 현장을 방문해야 할 때가 많았다. 사무소 직원들이 바쁠 때는 직접 운전을 해서 현장을 가야 하는 일이 잦았다.


  일과 시간에는 도로 곳곳에서 교통법규 위반행위를 단속하는 경찰관들이 제법 보였다. 교통신호가 없는 한적한 도로나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지인 운전자는 심각한 법규 위반이 아니라면 대부분 무사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수 없게도 단속에 걸리는 날에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상황을 모면했다.

자가운전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달랐다. 신기하게도 교통경찰관은 이방인이 운전하는 차량을 아주 잘 찾아냈다. 운전대를 잡고 첫 번째 골목길을 지나니, 저 멀리서부터 경찰관 한 명이 차를 세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는 매번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차량을 세워야 했다. 차량 단속을 둘러싼 우리들의 대화는 매번 똑같은 절차대로 반복되었다.


  “운전면허증을 제시하시오.”

  경찰관이 근엄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건넨 운전면허증을 유심히 관찰했다. 운전면허증 유효기간이 충분했기에 꼬투리 잡힐 만한 게 없었다. 다음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


  “차량 등록증을 보여주시오.”

  자동차보험도 가입된 차량이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차량 관련 서류로는 딴지를 걸지 못했다. 그는 차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기 시작했다.


  “한쪽 브레이크등에 불이 안 들어오고 전반적으로 차량이 너무 지저분해요.”

  꼼꼼하게 트집거리를 찾아낸 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중으로 브레이크등을 교체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레이크등에 불이 나갔다는 사실은 몰랐기에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거기서 쉽게 물러날 경찰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듯이 큰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자동차 외부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다음 주 월요일까지 법원에 출두하고 벌금을 내도록 하시오. 운전면허증은 다시 보여주시오.”  

  경찰관은 자동차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다. 이방인 운전자에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만약에 현지인 직원이 운전하고 내가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일이었다.


  그는 내 신분증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수첩에 차량 번호와 인적 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매번 반복되는 이런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그는 내가 탄 차량을 길가에 붙잡아두고 계속해서 시간을 끌었다. 경찰관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이방인에게 시간은 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정말 고생이 많네요.”

  나는 격려의 말과 함께 그에게 차에 보관하던 음료수를 하나 건넸다. 그는 매몰차게 음료수를 거절했다. 현지 지인들로부터 교통경찰관들이 원하는 게 돈이란 걸 익히 들어왔다. 그렇기에 돈을 대신해서 음료수로 요령을 피우려고 했다. 때마침 지갑에는 천 실링(한화 약 500원) 정도의 잔돈도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만 실링(한화 약 5,000원)을 보란 듯 창밖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하는 거요? 나는 뇌물을 받는 경찰이 아니오!”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순간 얼마 전에 보았던 현지 뉴스가 생각났다. 한 외국인 운전자에게 불법으로 돈을 받은 경찰관이 파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선뜻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의 시선은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에 머물러 있었다.


  “돈으로 매수를 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무더운 날씨에 경찰관님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에 동료분들하고 시원한 음료수 한 잔 사드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저는 관광객이 아닙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저기 나무 뒤쪽에다 놓고 가세요.”

  그가 못 이긴 척 선심 쓰듯 말했다. 그를 배려(?)해서 블랙박스에 찍히지 않도록 차를 앞으로 약간 이동했다. 차에서 내려 차 뒤편에 있는 나무 아래에 만 실링을 두고 주변 모래로 살짝 덮어두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나를 배려(?)해준 경찰관에게 감사하며 사례금 조로 약간의 돈을 주고서야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법원에 갈 필요도 없었고 벌금도 내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단속을 당했다. 그때는 경찰관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사람들이 너그러워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선물 같은 거 없나요?”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속으로는 ‘무슬림이 크리스마스도 챙기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열심히 근무하는 경찰관의 노력이 가상해서 천 실링을 주었다. 오히려 당당히 돈을 요구하는 경찰관이 귀엽게(?) 느껴졌다.

운전을 할 때에는 한적한 길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한국사람 중 한 분이 경찰관의 이러한 노골적인 행태가 싫어서 아프리카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은 하루에도 다섯 번 이상의 교통단속을 당한 날도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얘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돼서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현지에서 자주 교통단속을 당하다 보면 자연스레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속도제한 표지판이 없는 한적한 시골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관이 스피드건을 들고 나타났다. 시속 40㎞의 제한속도 구역에서 과속을 했다며 다짜고짜 과속 딱지를 내밀었다. 그렇다 보니, 장거리 운전을 밤에만 하는 한국인 분도 있었다. 밤에는 교통경찰관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상이다 보니 직접 운전을 할 때 교통경찰관을 마주치지 않은 날은 복권에 당첨된 듯이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런 일을 수차례 겪다 보니, 직접 운전하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처음엔 매번 교통경찰관에게 돈을 뜯기는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한국으로 치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경찰관에게 붙잡혀 괴롭힘을 당하는 마당에 돈까지 쥐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쉽게 돈을 주면 현지 경찰관들이 이방인을 계속해서 얕잡아볼까 봐 걱정이 들었다.


  교통단속에 잡히는 날에는 여지없이 길바닥에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일쑤였다.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한 현지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운전하기 전에는 미리 잔돈을 준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매번 경찰관에게 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직원에게 항상 운전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운전대를 잡는 이상 다양한 방법을 찾아서라도 이를 극복해야 했다. 현지 문화에 맞게 나만의 생존 전략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무소는 잔지바르 지방정부와 협력하여 초등학교 건축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직원을 통해 잔지바르 지방정부가 경찰 사무를 총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방정부 장관과 건축사업을 비롯하여 추가적인 협력 사항을 논의하려고 했다. 새롭게 취임한 지방정부 장관이 우리가 건축을 담당한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지방정부 비서실을 통해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만남이 성사되었다. 장관을 상대로 우리 사무소가 하는 업무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양 기관이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면담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에 장관에게 단체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나랑 찍은 사진을 어디에다 써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죠?”

  지방정부 장관이 농담 삼아 내게 말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장관님하고 친해지고 싶어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했다. 그렇지만 공적인 자리인 만큼 나는 애써 마음을 감추었다.


  그와 찍은 사진은 놀랍게도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통경찰관은 내가 시내를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아볼 기색으로 내가 탄 차량을 세세하게 둘러봤다. 모든 상황은 이전과 같았으나 나의 대답에는 당당함과 여유가 묻어났다.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시오.”

  경찰관이 내게 명령했다.

지방정부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은 나에게 해방감을 맛보게 해 주었다.

  “저는 현재 잔지바르 지방정부와 공동으로 건축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장관님의 지시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장에 가는 길이에요.”

  그리고는 핸드폰에 저장된 장관과의 단체 사진을 꺼내 당당히 경찰관에게 보여줬다. 사진을 본 그는 그냥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그 후로 교통단속을 당해도 확실히 이전보다는 한결 가볍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잔지바르 지역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공공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교통경찰관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를 그저 잔지바르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뜨내기 관광객 취급을 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중요했다. 뜨내기가 아닌 잔지바르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현지화된 이방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지방정부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자가운전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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