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잡설

비행기에 순응하시오 - <더 킬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자기 정당화.

by 북백하

1. 세계적 생활양식.

세계화란 그 자체로 명실상부하다. 우리는 트럼피즘과 최근 남미에서 이뤄지는 좌익 정권의 집권을 통해 반세계화의 물결이 전 세계에 일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파리 협정의 탈퇴나 동맹국에 대한 노골적인 방위금 압박 같은 과격한 외교 행보에도 불구하고 결국 별다른 외교적 변화를 보이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 1기나 무너진 페루 카스티요 정권의 사례처럼 신생 남미 좌익 정권들의 경제 정책이 대개 우경적으로 수정됨이 그러하듯 그 물결이 완전히 세계화를 무너뜨리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 역시 분명히 알고 있다. 반세계화를 주창하는 이들조차 세계화에 영합하는 이 딜레마는 현실 정치적인 맥락 그전에 매체적인 속성에서 시작한다. 영국의 극우 정당 개혁UK나 일본의 극우 신생 정당 참정당은 유튜브나 인스타 같은 SNS라는 전세계적 망을 담보로 하는 거대한 세계적 기업을 활용하여 그들의 반세계화적 가치를 젊은 세대에 퍼뜨렸고 그들은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같이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세계화를 사용하고 있음에서 ‘세계화’가 진정으로 세계화됐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어떠한가. 거대한 다국적 기업 넷플릭스는 각국에 유한회사를 세우며 수많은 영상 매체를 공급해 막대한 수입을 취한다. 기존에도 미국의 거대 배급사가 각국에 유한회사를 차려 영화를 직배급하거나 현지 제작해 수입을 얻은 사례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나 기존의 방식이란 인터넷을 통한 동시 배급, 동시 서비스라는 규모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넷플릭스와도 같은 OTT 기업들보다는 훨씬 못한 것이다. 배급의 측면이 그러하다면 영화 내에서 세계화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카를라 시몬의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세계적 자본 질서로 인한 자국 농업과 농업 공동체의 쇠퇴를 그리듯 관객들이 세계화로 인한 악영향을 그려내는 작품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세계화 그 자체를 더 나아가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담아내는 작품은 이미 우리 상식의 영역에서 보편화된 가치와 양식을 잡아내야 한다. 그런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세계화가 만연한 탓에 성립하기 힘들다.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더 킬러>에서 킬러 주인공은 첫 챕터인 파리에서는 보수에 따른 직업으로서의 암살 시도, 두 번째 챕터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부터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공격한 자들을 추적하고 보복하겠다는 분명한 동기를 가졌으나 동시에 지극히 반복적이고 강박적이라 관객이 보기에는 진부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행동만을 계속한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자신만의 운동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것을 목격할 뿐인가. 과묵하고 원칙적인 킬러의 행동을 나열함은 과거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사무라이>에서 비롯됐음이 분명 하나 더 킬러의 경우에는 그것이 세계적 범위로 확대됐음이 의아하다. 결말의 내가 이제 특별하지 않은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더욱 의아하다. 데이비드 핀처의 작업은 예컨대 씬 테이크를 수십 번씩이나 가졌다는 유명한 촬영 일화가 그러하듯 강박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더 킬러의 엔딩이란 스스로가 더 이상 강박적일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임을 깨달았다는 데이비드 핀처의 자전적인 고백인 걸까?


핀처의 필모그래피는 흔히 연출 스타일을 기준점으로 해 <조디악>을 기점으로 전기작과 후기작으로 나눠지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넷플릭스 활동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극장 영화에 대해서는 완전히 단념한 것처럼 넷플릭스에서만 충실히 활동하고 있는 핀처의 최근 활동이란 그런 기준점의 성립을 한 번쯤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생산한다. 데이비드 핀처는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시즌1 1 ~ 2화의 연출을 맡고 그 뒤로는 공동 제작자라는 직책을 수행했으며, 그 외에도 드라마 <마인트헌터>, 영화 <맹크>와 영화 <더 킬러>라는 프로젝트를 넷플릭스에서 진행하였다. 다음 핀처의 작품은 세계적 히트작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미국판 리메이크라고 한다. 영화라는 영역에서 세계화의 궁극적 정점에 놓인 OTT 사업을 통해 핀처의 작품이 제작, 배급되고 있음과 더 킬러의 주인공이 세계를 맴돌았음은 결코 무관한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핀처는 지극히 당연해져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도 힘들어진 세계적 일상의 영위를 초월적인 비행기로 훌륭하게 엮어내 세계화의 공간을 인식화하고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정당화한다.



2. 무너뜨릴 수 없는 지배의 공간에서.

어떠한 담론이나 의식이 지배하는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권능의 확인이 수직과 수평의 모습으로 나타남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는 한다. 여러 정치적 논란을 일으킨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경우 세계의 진보적 가치와 인종 화합이 살아 숨 쉬는 도시 ‘파리’를 형상화한 여러 퍼포먼스를 제시한 후 마지막에 파리의 랜드마크 에펠탑을 제시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퍼포먼스가 곧 파리라는 선언을 내세운다. 이때 올림픽 중계 카메라는 세계의 모든 곳에 우뚝 선 파리의 수직적 우월성을 드러내고 그 순간 파리는 세계의 모든 도시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우리가 개막식의 순간, 다른 국가의 랜드마크를 보고 있을 가능성은 너무나도 낮다)


이는 2024년 국내 개봉을 가진 영화들에서도 발견되는 성질이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일 부코>는 염소들이 동굴을 들여다보는 장면 다음, 도시에 빌딩이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화면으로 시작된다. 이때 지구의 핵의 방향으로 뻗은 동굴이란 수직적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도시의 빌딩과 유사하나 지구의 중력에 순응하는 자연적 존재라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지닌다. 반면 인간이 중력을 극복하고 건설한 것을 자랑하듯 승강기를 오르며 소개되는 빌딩이란 지극히 인위적인 존재이다. 동굴의 세계에서 벽이란 곧 수평적 땅의 연속으로 이어지나, 빌딩에서 벽이란 곧 하늘과 추락의 시작점으로 작용한다. 동굴 탐사대원들은 이탈리아 한 시골의 동굴을 조사한다. 그리고 동굴이 조사되며 그 모습이 정확히 명명될수록 죽어가는 한 늙은 시골 목동의 모습이 스크린에 인화된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동굴 탐사의 과정 중에는 긴 줄을 타고 내려가는 탐사대원들의 모습이 자주 비춰진다. 도시의 인위성을 연상하게 하는 수직적 탐사 과정의 끝에 동굴의 벽은 종이에 선으로 비로소 그려지게 되며, 땅과의 연속성은 그 지점에서 파괴된다. 위독해지던 목동이 결국 죽게 됨에서 도시의 수직적 유린이 한 수평적 세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알리체 로르와커의 <키메라>에서는 기계 장치로 짓밟히고 있는 이탈리아 땅이 묘사된다. 기차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로 시작한 영화는 이탈리아 땅에 대한 압제를 명확히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듯 이탈리아의 유물을 경매하는 보트의 엔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장면은 과거 고고학자를 목표로 삼았으나 결국 도굴꾼으로 전락한 주인공의 앞에 거대한 발전소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발전소라는 관념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영화 내에서 “이탈리아 만세”라는 구호는 곧장 “발전소 만세”라는 구호로 변주된다. 이것은 고대 문명의 유물이 발전소 앞에 묻혀있었음을 생각하면 기존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구호이다. 이탈리아 영토는 명백히 유물 경매장 보트의 엔진과 발전소가 그러하듯 외세적이며 현대 문물의 압제적인 침탈 위기에 놓여있다. 영화는 주인공의 말대로 ‘사람이 봐서는 안 될 ‘ 몰락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여신의 동상을 바닷속 제물로 바친 것처럼 주인공을 위기에 놓인 현시대의 제물로서 땅 속에 바친다. 그 결과 발전소라는 수직적인 이미지로 기계 장치로 짓밟힘이 강조되고 있던 이탈리아 땅이라는 현시대의 수평 세계는 소실돼도 한 지층의 유물로서 소실되지 않는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평적인 오프닝의 앙각으로 찍힌 나뭇가지를 시작으로 바깥 사물이 온전히 반사되고 있는 설원 속 연못과 같이 수평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수직적으로 존재하는 도시의 이미지를 제시한 뒤, 영화 막바지에 도시의 연예사 직원의 마지막 등장을 롱 쇼트로 설원 한가운데에서 수평을 향해 수직의 사람이 쓰러지는 것으로 보여줬음에서 그러하듯 수직에 대한 수평의 승리를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올해 개봉작 중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의 경우를 살펴보자. 주인공 히라야마는 더 킬러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매우 강박적인 일상을 반복한다.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영어를 어렵지 않게 알아듣는 장면이나 그의 음악 취향으로 우리는 그가 과거 중산층 계층의 지식인이었음을 손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생활 여건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루틴을 지켜나가며 삶에 만족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동료 직원의 음악 테이프 판매 권유를 시작으로 화장실 청소는 평시보다 훨씬 늦게 끝나게 되며, 단골 술집이 휴업하는 등 히라야마의 삶의 루틴이란 무너져 간다. 그의 과거 신분을 추측할 수 있는 장면으로 그의 동생은 히라야마를 바라보며 “이런 곳에 살아?”라고 하며 눈물을 훔친다. 그렇게 삶에 만족하려는 히라야마의 태도란 점차 불안해하며 삶을 긍정할 수 없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변하게 된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선택을 감행하는데 이때 영화는 그의 세계와 거대한 도쿄 스카이트리라는 마천루를 대립시킨다. 도쿄 스카이트리라는 수직의 이미지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독립 시행이라 위계를 따질 수 없는 평면적인 사건들로 히라야마의 세계가 전개되며 무너지고 있을 때,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순간에 도쿄 스카이트리는 유일하게 우뚝 선 거대한 객체로서 영화의 배경을 메우고 있었다. 또한 도쿄 스카이트리는 히라야마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출근길을 비롯한 매 순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의 세계에서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퍼펙트 데이즈의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히라야마를 전시하는 엔딩이란 개인이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물결에 순응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파리, 텍사스> 등 지식인 계층의 불안을 잡아내고자 했던 80년대 빔 벤더스 작품의 반복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과거 빔 벤더스 작품들의 인물들은 불안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그렇기에 퍼펙트 데이즈는 빔 벤더스의 불안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보수적인 파국에 가깝다.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빔 벤더스의 세계가 불안에 수긍하고 마는 것과 같은 변화가 발견된다. 더 킬러는 과거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연상하게 하는 화려한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반면 더 킬러가 킬러가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깨달으면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세븐은 윌리엄이 세계는 아름답고 싸워볼 만하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의 후자에 동감한다며 세계가 더러운 곳이기에 투쟁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내비치는 독백으로 막을 내리고 파이트 클럽은 엔딩에서 빌딩이라는 수직 세계가 폭발되며 사회에 대한 전복성이 표출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


(㉠) 영화 <파이트 클럽>의 마지막 장면. 금융 단지의 빌딩이라는 수직적 구조물이 붕괴된다.
(㉡) <더 킬러>의 도미니카 공화국 장면. 킬러는 비행기를 바라본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통해 지배되는 관념을 나타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더 킬러의 세계에서 지배 관념의 모습이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애인에 대한 피습 사실을 알게 된 킬러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돌며 사건의 단서를 찾아나간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돌던 킬러가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한 가지 객체가 그곳을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바로 비행기다. 수직과 수평은 서로 직각되는 관계이기에 그것들이 세계에 드러나는 방식은 대개 명확한 십자 모양이나 뫼 산 자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 둘의 관계는 좌표 평면에서의 x축과 y축의 관계와도 같다. 수평은 수직을 무너뜨릴 수 있고 수직은 수평을 압제할 수 있으나 그 둘의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종속적이다. 직각되는 기준선 없이는 수직도 수평도 성립하지 않는다. 반면 비행기는 다르다. 더 킬러에서 비행기는 x축과 y축의 관계가 아닌 z축의 원근 관계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런 비행기는 땅보다 높게 있을 수밖에 없기에 y축에서의 땅에 대한 우월성을 보장받는다. 이로써 비행기가 땅이라는 평면 세계로의 종속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활용은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에서도 확인된다. 3000년의 기다림은 오프닝에서 터키 이스탄불의 광경을 비행기의 방향을 향해 z축으로 당긴다. 그렇게 이스탄불이라는 영화의 배경은 비행기 아래의 평면 세계로서 독립적이나 지배적인 관계로 위치하게 된다. 비행기와 나레이션이라는 x, y의 십자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들은 영화 속 현실의 터키, 영국 그리고 정령이 들려주는 환상 세계의 세 가지 이야기가 위계 없는 수평적 질서나 서로 독립돼 있는 생뚱맞은 환경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들을 유려하게 연결한다. 물론 장건재의 <한국이 싫어서>가 비행기를 단지 한국을 탈출하고 싶은 젊은 세대의 상징으로만 활용하였듯이 비행기를 기존 세계에 위치시킨 단순한 상징으로서의 활용 방식도 존재한다. 그러나 비행기는 공중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종속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특별한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세븐의 경우 하늘을 거의 찍지 않은 채 건물과 도시만이 존재하는 종속적인 배경을 그려낸다. 세븐의 배경이 되는 뉴욕시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상상하기 어려운 도시라는 걸 반영하였는지 몇몇 장면에서 하늘이 등장하는 순간에도 하늘에는 영화 막바지의 헬리콥터를 제하면 비행 물체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평면에서 쌓인 뒤틀린 세계의 가치가 거대한 빌딩으로 형성되게 된다. 이처럼 두 영화에는 자유로운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윌리엄의 말마따나 싸워볼 수 있는 대상이기에 투쟁을 다짐하거나 세계를 폭발시키는 형태로 나타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더 킬러의 세계는 비행기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빌딩을 무너뜨릴 수도 싸움을 다짐할 수도 없는 저항의 가능성이 완전히 거세돼 버린 평면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 <더 킬러> 中. 킬러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린다.

3. 비행(飛行) 세계의 유령.

비행기로 연결된 아래의 좌표에 수평적인 여섯 세계가 있다. 수평적인 세계는 각각 프랑스 파리, 도미니카 공화국, 다음 네 지역은 전부 미국이다. 뉴올리언스, 플로리다, 뉴욕, 시카고. 주인공은 다섯 세계를 오간다. 흥미롭게도 그의 여정에서는 여타 영화에서는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이상 제시되지 않는 신분증 제시라는 절차가 매번 등장한다. 처음으로 등장한 신분증 제시 장면을 제외하면 신분증 제시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절차로 표현돼 일말의 긴장감조차 유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분증으로 알 수 있는 그의 이름이란 ’ 벙커‘, ’커닝햄‘, ’그랜트‘, ’제퍼슨‘ 등 제시의 순간마다 매번 바뀌어 나타난다. 그렇기에 킬러 내지는 주인공이라 서술해 온 그의 실명을 관객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름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존재한다. 그는 분명히 살인 청부 업자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으며 애인 피습에 대한 보복을 수행하고자 한다. 목적이 확인됐으니 이제 그의 ’업‘이 수행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을 위해 잠복하였고 그곳에서 맥도날드 점포 수에 관한 통계를 읊으며 햄버거를 먹었다. 뉴올리언스에서 그는 운송회사 FedEx의 직원으로 위장해 하필 ’국제 무역 변호사‘라는 명함을 내건 암살 중계자 에드워드 호지스의 사무실에 잠입하였다. 시카고에서 그는 아마존의 택배보관함 배송 서비스를 이용해 카드복사기를 구매하였다. 이처럼 그의 과정에서 마치 기업 광고를 하는 것처럼 노골적인 상표명의 전시가 이뤄짐이 발견된다. 이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맥도날드, FedEx, 아마존은 모두 다국적 기업으로 전 세계를 바탕으로 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가짜 신분증을 이용해 시카고에서 카리브해 제도로 돈을 송금하였다. 알다시피 시카고는 금융 산업이 발달한 도시고 카리브해 제도와 그의 별장이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은 유명한 조세회피처로 그가 가짜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음을 떠올렸을 때, 여기에서 실제로 여러 조세회피처를 통해 편법적 탈세를 일삼는 몇몇 다국적 기업들이 연상되지 않을 여지는 없다.


이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금의 은밀한 이동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시크릿 세탁소>에서 묘사된 바가 있다. 시크릿 세탁소에서의 사건과 공간은 뜬금없이 중국의 보시라이 부패 사건이 나오는 등 더 킬러의 경우보다도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더 킬러가 비행기를 통해 그것들을 연결한다면 시크릿 세탁소에서 그러한 평면적 공간들을 연결하는 것은 나레이션이다. 실제 세계의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부패한 변호사들을 통해 연극적 공간을 제시하며 시작된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작중에서 엘렌 마틴을 연기한 메릴 스트립이 세트장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이 구조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임을 관객들에게 말하는 장면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작품적 유사성보다도 눈길을 끄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사에서 배급한 작품이다.


넷플릭스의 탈세 의혹은 세계 각국에서 제기돼 왔다. 2021년 대한민국 국세청은 넷플릭스가 탈세를 저지르고 있다며 넷플릭스에 780억 원을 추징하였다. 2024년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탈세 의혹을 수사하겠다며 넷플릭스에 대한 압수수색을 감행하였다. 더 킬러와 시크릿 세탁소는 자본의 실체를 알 수 없는 글로벌 세계의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정작 그 작품들은 탈세 의혹에 놓여있는 다국적 기업 넷플릭스의 지휘 아래 배급되고 있다. 더 킬러의 경우 넷플릭스의 지원이 없었을 경우 탄생하지 못했거나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제작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넷플릭스의 지원이 아니고서야 더 킬러 같은 비상업적 서사를 지닌 작품에 1억 5000만 달러라는 거금이 투입될 일은 거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은 더 킬러의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한다.



(㉣) < 더 킬러>의 프랑스 파리 장면. 킬러는 상층에서 하층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4. 주문의 반복, 죽음의 연쇄.

“(여러 작은 섬나라들의) 많은 회사들이 무엇을 할까요? 우리도 몰라요.” - <시크릿 세탁소> 中.

킬러는 강박적인 자신의 습관을 실천하기 위해 “계획대로 해.”라고 주문을 읊조린다. 그 주문은 히라야마의 강박적 일상 루틴이 무너지듯 파리에서의 암살 실패와 애인 피습 사건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변해 그에게 닥쳐온다. 그는 처음 파리에서 약육강식의 논리를 옹호하며 자신이 피식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음을 감사하였다. 여기서 약육강식의 논리란 그가 높은 곳에서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며 하는 말이다. (㉣) 더 킬러는 그 순간 수직적 질서를 잠깐이나마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시카고에 위치한 의뢰인을 만나러 반대로 빌딩을 오름에서 그가 수직적 질서에서 하층의 약자에 속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보복을 나선 킬러가 지나간 길에는 핏자국이 스민다. 그는 암살자들을 태워준 도미니카 공화국의 택시 기사를 무참히 살해했으며, 아내를 공격한 두 암살자를 끝내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희생자들은 택시 기사처럼 영문도 모른 채 죽거나,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이름 없는 여자 킬러 ’전문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 킬러 마커스처럼 죽음에 대항하나 결국 사망한다. 앨런 클라크의 1989년 BBC TV영화 <엘레펀트>는 당대의 북아일랜드 위기에 따른 사회의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자행하는 수많은 살인의 연속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그가 사실상 세계화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기에 더 킬러의 수많은 죽음은 세계화 질서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먹이사슬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는 피습 사건 이후 보복을 수행해 가면서 기실 자신이 수많은 다국적 기업과 금융 권력의 종이었을 뿐이라는 진실을 깨달아간다. 마침내 그는 시카고의 금융 권력에 너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며 조심하라는 경고를 내뱉는 지경에 이른다. 이 과정은 한 엘리트주의자가 대중의 정서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사회 계급의 최상층에 올라서 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다. “미안해. 나는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시카고의 의뢰인은 자신은 그저 파리에서의 암살 실패에 대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제안에 그렇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라며 킬러에게 자비를 부탁한다. 이로써 사회 최상위층일 그들이 금융 권력으로서 비행기의 지배 권능을 이용해 막대한 수입을 얻고 있음은 분명 하나, 사건이 어떻게 수행될지도 몰랐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비행기의 비종속적 구조의 부품임이 드러나게 된다. 빌딩이라는 종속적 수직은 지배 계급을 나타내나 수직 그 자체는 세계를 지배하는 권능은 될 수 없다. 최상류층조차 자신들의 도구라고 자부해 왔을 세계화 체계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확인한 그가 빌딩에서 나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하나다. 전문가처럼 체제에 순응하는 방법.


다시 넷플릭스 이야기로 돌아가자.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작품 투자 방침이란 다음과 같다. 창작자에게 무한한 자유와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하되, 판권은 넷플릭스가 전부 소유한다. 이 방침은 황동혁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넷플릭스의 한국 영화 시장 진출 이후 기존의 영화사들이 거절하던 여러 기획이 실현됐음에서 알 수 있듯 창작자가 자신만의 창의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좋은 영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큰 문제 또한 가져왔다.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판권과 흥행 수입은 전부 넷플릭스가 가진다. 여기에 넷플릭스의 비간섭 정책과 안정된 수입 보장까지 더해지자 적당한 영상만 공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 제작자는 상업적 측면에서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할 동기를 잃는다. 질이 낮거나 그저 그런 작품 위주로 넷플릭스가 채워질 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그런 정책을 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비자들이 OTT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것처럼 지금 OTT 시장은 포화상태다. 세계적으로는 디즈니 플러스, 애플 티비, 아마존 프라임이 있고 국내에서는 티빙, 웨이브가 있으며 심지어는 유통 기업인 쿠팡까지 OTT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차세대 경쟁자들을 상대로 승리할 방법은 다음과 같다. 최대한 많은 영상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넷플릭스는 창의적이고 뛰어난 소수의 영화보다는 평범한 다수의 영화를 많이 공급받기를 원한다.


넷플릭스를 켜면 제일 먼저 관객은 그렇게 공급된 수많은 영화가 알고리즘에 근거한 맞춤 추천에 따라 정렬돼 있는 화면을 목격한다. 여기서 영화의 정보는 섬네일로서 존재할 뿐이다. 감독과 시청 등급 같은 세부 정보는 섬네일을 클릭한 뒤에야 작은 글씨로 관객 앞에 나타난다. 데이비드 핀처는 넷플릭스의 성장을 이끈 획기적 작품인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공로자이다. 공로자로서의 대우인지 핀처는 드라마 <마인드헌터>의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실적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넷플릭스 측의 엄청난 지원에 힘입어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2020년 발표된 핀처의 <맹크>의 경우를 보자. 원래 맹크는 2003년 제작됐을 작품이었다. 당시 데이비드 핀처는 맹크를 흑백으로 만들겠다고 고수하였고 그 탓에 맹크 프로젝트는 좌절됐다. 핀처가 맹크를 먼 훗날 흑백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넷플릭스의 지원과 허가 덕분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지원과 개인의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핀처의 작품은 셀 수 없을 만큼 계속 공급돼 오는 넷플릭스의 수많은 영화와 함께 나란히 배치돼 그 독자성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그런 넷플릭스는 핀처에게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다. 핀처는 넷플릭스 감독이라는 현 위치에 만족하는 걸 넘어, 인터뷰에서 기존 영화 산업이 창작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음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많은 영화인이 OTT에 대항해 지켜오려고 했던 –영화적 감상의 공간- 극장마저 ’냄새 나는 싸구려 공간‘이라며 힐난한다. 넷플릭스 영화를 영화로 봐야 하느냐는 너무나도 오래된 논쟁이다. 하지만 핀처의 기존 시스템에 대한 공격이란 단순히 넷플릭스 영화의 영화 여부를 따지는 오래된 논쟁의 단계가 아닌 OTT가 극장보다 우위에 있음을 통보하는 것에 가깝다. 이미 많은 영화감독들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에서의 영상 제작 경험을 가졌다. 마틴 스콜세지(영화 <아이리시맨>,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연출), 스티븐 스필버그(드라마 <헤일로> 제작), 리들리 스콧(영화 <나폴레옹> 연출) 같은 노장 감독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아이리시맨을 연출한 2019년의 스콜세지는 넷플릭스의 비간섭 원칙을 칭찬하면서 기존 영화사들의 간섭적이고 보신적인 투자 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아이리시맨 상영을 둔 미국의 대형 극장 프랜차이즈와 넷플릭스 간의 거래가 실패한 데에는 대규모 극장 상영이 이뤄졌으면 좋았을 거라며 아쉬움을 밝혔다. 마틴 스콜세지의 사례와 같이 OTT와 협력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OTT 시장의 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나 동시에 OTT의 주된 영화 감상 방식인 컴퓨터나 TV, 휴대전화를 통한 영화 관람이 극장보다 못하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그 이상의 호의적 답변을 내놓는 것을 꺼린다. 반면 핀처는 다르다. 핀처는 더 킬러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킬러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공고한 세계적 질서를 깨닫고 대중적 정서를 가지게 되는 과정을 제시했다. 아무리 강박적인 영화인이라도 세계적 질서라는 이 거미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는 영화 매체가 대중에 영합하는 공간에서 출발하였음을 생각하면 이것은 먼 훗날 ’영화관‘이란 대중성이 박탈당한 공간으로서 소수 시네필 계층만의 향유 공간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소름 돋는 예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핀처는 영화가 영화로서의 독자성을 잃게 된 새로운 대중의 세계, 넷플릭스의 전용 감독이라는 본인의 현 위치를 변호하고 정당화한다.



5. 신세계의 행동 강령

안국진의 영화 <댓글부대>에서 대기업의 인터넷 여론 조작을 취재하던 임상진 기자는 이영준의 거짓된 제보에 넘어가 아마추어 웹소설 표절 기사라는 큰 사건을 일으켜 파직당한다. 그 이후 임상진은 독자적인 후속 취재를 가진 뒤 그것을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하며 인터넷 여론 조작팀의 방식을 사용한다. 영화 댓글부대는 임상진 기자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 그의 나레이션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영준의 닉네임에 함의가 있을 것이라며 애당초부터 이영준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접근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그의 모습은 기자보다는 차라리 비합리적인 음모론자에 가까운 것으로 신뢰할 수 있는 화자의 모습은 아니다. 그의 선택이 과연 옳았을지 그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기는 했는지는 영화 내에서 묘사되지 않는다. 댓글부대의 세계는 국가를 쥐락펴락하는 대기업에 의해 지배된다. 댓글부대에서 지배의 영역이란 국제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댓글부대가 어떠한 수직적 질서를 드러내 그들의 무서움을 폭로하는 대신 진실을 알 수 없게 된 인터넷 세계의 무질서에 관심을 가졌음은 흥미롭다.


댓글부대의 기성 미디어는 특정 기업의 의도에 쉽사리 지배되고 마는 공간으로 질서 잡혀 있으나 상당수의 정보는 기득권에 의해 조작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 미디어를 대신하는 인터넷 공간의 정보가 정확한 건 더더욱 아니다. 파직된 임상진의 취재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실소유주가 철저하게 감추어진 수많은 불법 카지노 광고창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는 수용자에 대한 공급자의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기에 광고 차단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반칙을 하지 않는 이상 접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또한 광고는 어떠한 평면의 기준점 없이도 그 존재가 성립하며, 단순히 화면을 메우기만 한다는 점에서 더 킬러의 비행기와 어떠한 좌표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속성을 공유한다. 인터넷 세계의 무질서는 현실로 역류했고 그 결과 임상진은 파직됐다.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면 댓글부대의 세계에서 명확한 진실이란 단 하나다. 대항할 상대의 방법을 사용하라는 결말의 행동 강령이다.


댓글부대와 더 킬러는 결국 비슷한 지점을 남긴다. 우리는 비행기가 지배하는 세계화 질서 속에 살고 있다. 세계화 질서는 분명히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했고 그곳에서 사건의 책임 주체는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세계화의 적대자를 자처하는 자들조차 세계화를 내재화한 현실을 생각했을 때, 이것의 대안이 세계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OTT 시장 체제가 가지고 있는 산업적, 영화적 측면에서의 단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의 대안이 OTT 도래 이전 영화 시장으로의 복귀라면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또한 이에 따른 창작자의 자유가 가져온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마냥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국적 기업 넷플릭스의 막대한 자본력을 통해 세계화 시대의 맹종을 꼬집은 데이비드 핀처의 더 킬러는 결말의 순응성에도 불구하고 도전적인 통찰로 작용하게 된다. 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잡는 건 물론이요 세계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조차 복고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러니 옛 방법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방법을 향해 나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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