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잡설

만주는 없다 - <하얼빈> 후기

관념으로서의 만주

by 북백하

만주라는 한민족의 고토가 있다. 만주는 과거 한민족 계통의 국가의 영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만주가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에게 지리적인 면에서 이미 소실됐음을 알 수 있다. 과거 60년대 대륙극 영화들 소위 '만주 웨스턴' 영화를 사막에서 재현하겠다는 시도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만주가 우리의 땅이 더 이상 아니라는 현실에서만 가능하다. 실재하는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만주는 만주 웨스턴을 비롯한 다양한 오늘날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황무지 내지는 광야로서의 만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공간이다. 황무지 만주란 오늘날 한민족의 영역이 한반도에만 위치하고 있는 현실의 제약에 따른 인식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동북아의 현 정세와 조선 민족이 발해 이후로 만주라는 영역을 독립국으로서 향유한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가 자연스럽게 "옛날에는 이 땅이 전부 우리 것이었는데."라고 능청을 떠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60년대 대륙극의 21세기 변형판인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만주 대지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실제 만주와는 전혀 생뚱맞은 중국 둔황 지역까지 가서 촬영됐음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막 만주의 등장은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에서도 발견되는 등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결국에 만주라는 대지의 현실과 부합한 민족적 인식이란 단 하나뿐이다. 만주가 한민족의 고토였다는 관념뿐이다.


안중근은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만주의 광활한 황무지가 그러하듯 거대한 대지를 기어코 스크린에 그려내고 마는 꽁꽁 언 두만강 역시 너무나도 어색하다. 실제 두만강은 한탄강 수준의 폭을 가진 강으로 영화 속에서 그리는 광활한 대지를 자체적으로 형성할 수준의 너비를 지니지 않는다. 경험의 차이인지 장률이 <두만강>에서 두만강이라는 공간을 탈북자와 조선족들이 실재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적 공간으로도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하얼빈에서 두만강의 모습이란 너무나도 허황된 대지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대지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존재로 작용한다.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고 마적단이 된 박점철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겪은 고통을 말하며 모두에게 고레고레 소리친다. 그리고 박점철의 한탄에 대해 공부인은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호통으로 대답하며 독립운동가들의 고뇌와 고통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섬김을 의무화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두만강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만강이라는 공간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토 히로무비 사살)을 깨닫는다. 그리고 안중근은 결말에서 공부인과 비슷한 말을 되뇐다. 우리는 대한이 독립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거라는 위대한 선전을.


영화 초반부에 안중근의 이상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중대한 실책과 그 이후 안중근이 이토 암살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은 두만강 - 과거의 신아산(山) 전투 - 독립군 기지라는 세 공간을 거치며 묘사된다. 이때 안중근의 실책이 존재하던 전투를 생각해 보자. 전투는 동지를 잃은 다른 운동가들이 독립군 기지에서 그를 비난하거나 두둔하는 형식, 즉 재판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재판이 전개됨에 따라 과거 신아산 전투는 구체화된다. 신아산의 공간이 재판의 전개에 기대고 있음에서 관객은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공간이 아닌 대사의 회상으로서의 파생형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아산의 실책은 곧잘 두만강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때 두만강이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신아산이 과거를 재구현 했다면, 두만강은 그가 자기 성찰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무대로 사실상 관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신아산과 두만강은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나 안중근의 입, 혹은 생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얼빈의 결말부에는 김상현과 그의 동료들이 말을 타고나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이 장면은 어딘가 낯이 익다. 이 장면은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이 말을 타고 거짓된 만주로의 회항을 시작할 때 그대로 사용된 바가 있다. 그 사용이란 다음과 같다. 눈으로 세상이 뒤덮인 겨울날, 그들은 말을 타고 나무 아래로 모인다. 그리고 일행이 말을 타고 겨울날의 블라디보스보크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뒷모습을 롱샷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거친 뒤, 만주로의 공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롱샷으로 잡을 때 관객은 자연스레 그들이 먼 곳으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한편 쓸쓸한 겨울 풍경은 그들의 외로운 투쟁을 관객이 실감할 수 있게끔 한다. 그렇게 운동가들이 도착한 곳은 앞서 말했듯 고토라는 관념만이 존재하는 거짓된 만주이다. 이것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다음과 같이 활용된다. 김상현은 모리 일본군 소좌를 죽이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동지들과 말을 타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일전에 만주로의 전환을 위해 활용된 바가 있는 장면이 다시금 스크린에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 여정에서의 '블라디보스보크 - 만주'로의 공간을 '블라디보스보크로 추정되는 한 유럽풍 도시 - 두만강'으로 변주하며 그들의 목적지가 이번에는 만주가 아닌 두만강임을 확실히 밝힌다.


만주&두만강과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전개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장면들의 관계를 보자. 이 관계는 전혀 대등하지 않은 관계이며 만주와 두만강은 모든 장면/공간 위에 군림한다. 두 공간이 여타 현실적인 장면 뒤에 배치돼 장면의 일련에서 대개 뒤에 존재함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하얼빈의 흑백 화면으로 묘사된 플래시백 화면이 김상현의 배신이라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배치됐듯 특정 장면 뒤에 배치됐다는 것만으로는 두 공간이 모든 것의 봉사를 받는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건조한 척하는 장면 장면에서 의도가 뚜렷하게 보이는 대사가 계속해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신아산의 공간이 형성되는 방식이 영화 전반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모든 요소가 두 공간에 협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철저히 아래에 위치해 그것을 떠받들며 복무하고 있었음은 확실시된다. 영화 초반부의 안중근 재판이라는 행위에서 신아산이라는 공간이 형성되고 그 공간에서의 회고를 토대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이라는 결론이 맺어졌듯, 하얼빈은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토대로 만주와 두만강에서의 고뇌와 대의를 확고히 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프로파간다를 위한 인공적인 공간을 위해 영화 내내 모든 장면이 복무한 셈이다.


그렇기에 하얼빈은 영화의 말미에서 말을 타고 가는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다시금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다시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후 공간의 제시가 이뤄지는 방식은 그들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서사의 수립이나 합당한 과정에 따른 결론이 아니다. 장면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그들이 극복하는 서사를 위해 제시됐다기보다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공간을 제시해야 하는 영화가 스스로 건조한 척을 하며 처하게 된 늪에 가깝다. 이 점에서 하얼빈의 대지행은 궁극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극히 도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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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png (㉠) 윤제균의 <영웅>에서 안중근은 교회 문을 열어젖히고 설원으로 나가 노래 '장부가'를 부른다.

대지를 사용한 도피는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재작년 겨울에 개봉한 윤제균의 <영웅> 같은 경우 안중근이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성당 문을 열어젖힌 뒤 지리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한 가상의 설원에서 자신의 포부를 노래할 수 있게 한다. (㉠) 영웅이 안중근이라는 하얼빈과 동일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음을 감안했을 때 이는 너무나도 흥미롭다. 그런 한편 이 도피 방식이란 이냐리투의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가 뒤죽박죽 한 공간을 제시하다가 바르도의 혼돈된 정체성을 멕시코의 가상된 한 사막에서 제시하며 막을 내리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바르도가 방황하는 그곳은 지극히 과장되고 망상적인 가상의 사막이다. 영화 전반의 과장된 초현실적 묘사를 생각했을 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바르도에는 멕시코의 세계라는 지극히 무대로 보이는 허황된 도시에 코르테스가 만들어 낸 학살의 탑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 모든 이야기가 무대에서 이뤄지는 이야기임을 보이게 해 관객이 사막으로의 유폐를 긍정하게끔 하는 듯한 묘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에 서로 아무런 접점 없이 떠도는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는 바르도의 자의식과잉이라 할만한 노골적인 혼란상들이 하나로 뭉쳐질 만한 마땅한 순간도, 순간을 담보할 어떠한 과정조차 제대로 존재하지 않음을 감안했을 때, 모든 이미지와 관념을 말 그대로 지리적 위치를 알 수 없는 한 사막에 동시에 때려 박아 결말로 넘어가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사막의 등장을 담보하기에는 너무나도 따로 표류한다. 바르도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무지로 나아가는 것은 방황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방황 끝에 나온 영화 스스로의 도피에 가깝다. 최동훈이 <암살>에서 밀정 염석진을 처단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암살에서 염석진은 전지현의 총에 맞은 뒤 비틀대다가 문을 열고 흰 천이 나부끼는 황무지로 나아가 쓰러진다. 그렇게 염석진은 암살이 제시하는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의 반공적 논리에 따라 무마됐다는 정치적 현실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는 상징적 공간에 유폐되게 된다. 암살의 정치적 현실에 위배되는 이 장면을 통해 암살은 아직도 친일 세력이 청산되지 않은 채 기득권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관객에게 설파한다.


하지만 암살이 황무지를 엔딩 말미에서 이념 설파의 용도로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하얼빈은 그것을 영화 전반으로 확장해 버린다. 그 결과 하얼빈은 여타 한국 역사 영화들이 가지는 것보다도 훨씬 노골적이고 지독한 프로파간다성을 띄게 된다. 나는 프로파간다를 전혀 나쁘게 보지 않기에 이 자체로는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하얼빈은 전술하였듯 철저히 황무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철저하게 황무지의 공간에 복종하도록 설계돼 있다. 하얼빈의 세계에서 프로파간다란 매우 노골적이고 누군가에게 승인받기를 원하는 대사만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개에게 먹이를 주듯 김상현한테 스테이크를 모리가 던져주는 장면처럼 조선인을 개돼지 짐승으로 취급하는 일본군 소좌가 그런 조선인인 안중근의 위대함을 인정할 수 없어 계속해서 "안중근은 어디 있나."라는 주문을 계속해 외우며, 안중근의 동료는 죽어가면서 안중근의 위대함을 모리를 바라보며 칭송하는 우스울 지경의 대참사가 발생한다. 히로부미는 기차에서 "조선은 300년 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으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라고 조선 민중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대사를 내뱉으며, 이에 휘하의 호위대장은 이순신을 언급하며 지금 조선에는 이순신이 없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 히로부미에게 말을 건넨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히로부미를 비롯한 당대 일본 정치가들의 조선인에 대한 선민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만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영화는 그것을 넘어 마지막에 반드시 뜬금없이 가장 대중적인 일제시대 정치인인 '김구'를 언급하고 변절한 운동가가 다시 독립운동으로 투신한다는 상상을 대중에게 제시한다. 본 작품에서 김구의 등장은 암살에서 김구가 대중적 인기를 구사하는 독립운동가로서 그들을 기리는 역할과 염석진을 의심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보다도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로 사실상 불필요하다.


결국 구한말 당시의 조선 민족의 한 독립운동가를 찬양하는 이 영화는 일본의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한 무장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 채 히로부미가 그의 맞수도 아닌 '안중근'의 이름 석자만큼은 알고 죽었을 거란 대안적 환상을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분명히 민족 자주적 성격으로서의 대일본 투쟁을 다룸에도 일본군과 일본 정치인의 입을 빌려서만 그들의 위대함을 칭송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독립 투쟁을 다룬 영화보다도 일본에 의존적인 착란 증세를 나타낸다. 애초에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싸움이라는 구성은 이 영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노래를 통한 그 둘의 대결로 구상된 영웅이 낫다.) 원신연의 <봉오동 전투>의 경우 관객들에게 단순히 나쁜 일본군을 때려잡는 독립군의 활약상이라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단순 오락성이 하얼빈의 대참사를 예방한 것이다. 봉오동전투에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더 미개하다!"를 외치는 한 일본군 소년병 캐릭터가 등장한다. 일단 여기에서는 이 방식의 저급함은 뒤로 하고 그 자체만을 보겠다. 이것은 그들도 (여기에서는 일본인이 되겠다.) 우리의 위인을 기릴 필요가 있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하얼빈의 경우 단순 프로파간다를 넘어 일종의 숙명론적인 결론이 아닌 단순히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안중근을 절대적으로 그들의 입에 의존해 확인받는 능동성이 박탈된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자해 행위에 가깝다. 결국 하얼빈에는 작전이 수행되는 세계에서 패배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함을 찾기 위한 '대지로의 도피'만이 성립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늪에 빠진 채 패배한다. 그리고 하얼빈은 그 결과 자살한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이마이 다다시 감독을 통해 <망루의 결사대>라는 국책 영화를 공개하였다. 만주에서 활개 치며 선량한 민중을 위협하는 마적 떼를 정의로운 일본군이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좌익 성향이었던 이마이 다다시 감독은 훗날 조선총독부의 국책 영화를 제작한 것을 자책하였다. 두만강 인근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을 보면 하얼빈에서도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망루의 결사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존하는 두만강이라는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조선인이 국경이라는 공간을 일본군의 치하에서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지극히 사실적으로 제시되는 민족의 국경 두만강과 조선 민족의 고토 '만주'는 일본 제국의 치하에서만 조선 민족에 보장되는 것으로 망루의 결사대는 우리가 만주를 일본 제국의 2등 신민으로서만 누릴 수 있음을 설파한다. 비록 자주적이지는 않지만 근대 국가의 신민으로서 조선 민족이 만주라는 잃어버린 고토를 누린 시기가 고작 7년 만에 끝나게 된 어설픈 고종의 간도 침탈을 제하면 일제시대뿐이라는 사실은 일제시대의 만주가 얼마나 이중적인 공간인지를 드러나게 만든다.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가 만주가 우리 땅이었음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할 때, 망루의 결사대는 그 사실을 되묻는 듯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앞선 이마이 감독의 일화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두만강과 사막 만주라는 거짓된 대지를 위해 일본에게 독립운동을 인정받고자 하는 하얼빈보다 '진정한 만주의 수호자인 일본제국이 만주라는 대지를 지배하는 세상'을 서부극의 재미로 조선 대중에 선보인 망루의 결사대가 훨씬 더 정직한 작품이 든다. 감독의 진심은 얼마든지 총독부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었던 거지만,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망루의 결사대가 하얼빈보다 훨씬 우수한 작품이다. 언제까지 독립운동은 인정 투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 돼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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