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세계를 극복하려면.
1.
하늘에 뜬 외계 침략자의 우주선은 매순간 수증기를 내뿜는 이미지를 하늘에 투영한다.(㉠)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이하 '데데디디'로 통칭.)의 2부에서 '망가진 원자로'라는 대사를 통해 이미지의 정체가 직접적으로 제시되듯 이것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발생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 대한 비유이다. 한편 건강에 대한 과한 우려를 가지고 있는 카도네의 모친과 각종 가짜뉴스의 범람에서 2020년 코로나19 판데믹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전에 45년 8월 6일의 대학살이라는 오래되고 오래된 모티브를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미군은 일본 정부와의 어떠한 논의도 없이 '신형폭탄'을 도쿄 상공의 외계 모함에 떨어뜨려 통칭 '8.31'이라는 사건을 일으킨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학살을 다루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8월의 광시곡>의 제목에 8월이 들어가는 것처럼, 하필 사건 발생의 시기가 8월로 설정됐음은 신형폭탄을 언급하는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노골적인 처사인 것이다. 기괴하나 지속되는 이상한 사회를 그리는 이 작품에서 두 번의 노골적 처사가 어떠한 일본 일상의 병리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어렴풋이 제시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CIA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중과는 유리된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SES의 회장 타카라다를 암살하고는 그의 비서를 통해 외계 기술을 응용한 비밀 모함을 탈취하려고 한 사례처럼 미국은 이 영화에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이다. 이때 그들을 심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CIA를 심판하는 코히루이마키 켄이치는 외계인을 수거하고 다니며 훗날 '신일본조화'를 자처하게 되는 우경적 정치 집단 청년공투회의의 간부이다. 데데디디 파트2에서는 광장에서의 활동을 일삼는 두 정치 집단이 묘사된다. 두 정치 집단이란 침략자 학살을 반대하는 집단 SHIP과 침략자 척결을 실천하는 청공투이다. 코히루이마키는 SHIP의 단원에게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누군가를 해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에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거라며 비주류 정치세력이라는 똑같은 처지에서 비롯됐을 조언 내지는 조소에 가까운 말을 쏘아붙인다.
두 집단의 대치 상황이 종료된 뒤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어느 침략자 보호 운동가는 SHIP의 단원인 후타바에게 침략자를 무찌르기 위한 병기를 제작하는 SES의 회장인 타카라다를 암살하자고 제안한다. 운동가는 SES사의 발표가 있는 날 타카라다를 쏴 죽이기로 결정하나 그가 등장하지 않자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세상을 바꿀만한' 어떠한 결정적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작품에서 퇴장한다. 타카라다가 무대에 일정대로 등장하지 못한 이유는 미국 CIA 요원들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SHIP 진영의 행동가는 너무나도 느리고 기민하지 못한 존재이다. 그는 미국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 정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트2의 정부는 국민을 기만하며 사회 상류층들이 거주할 방주를 하늘에 띄우지만, 이것은 파트1의 미국이 침략자를 일본 정부에 일언반구도 없이 비밀리에 연구하던 것을 다시 반복할 뿐이라는 점에서 결국 미국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렇기에 본작에서 활동하는 정치 집단 중 현 세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진정한 행동파라 불릴 집단이란 오직 코히루이마키를 비롯한 우경적 행동 집단 밖에 없다.
2.
국내 정치적 문제를 직접 언급하는 건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87체제의 종언이라고 할법한 상황이 벌어지는 작금의 정치 상황과 이 시기 개봉한 몇 가지 영화가 조응한다는 점은 너무나도 공교롭다. 데데디디도 어떠한 대사건 이후의 일상을 그린다는 부분에서 현 세태와 나름 조응하는 듯하다. (물론 공교롭기만 할 것이다...) 현 유럽의 리버럴적 세계를 매 작품마다 조롱한다고 봐도 좋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에서 존은 소행성 멜랑콜리아가 결국 지구를 때려부술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에 기실 소행성의 존재조차 견딜 수 없는 사람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것을 관람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승리를 '즐길 뿐'으로 풀어내왔던 그 느낌이 현현되자마자 존은 수면제를 먹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의 시국을 생각했을 때, 멜랑콜리아의 재개봉은 그 자체로 '민주적' 6공의 종언을 시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작년 12월 26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황동혁의 오징어게임을 보자. 데데디디에서도 느껴지던 묘한 반미적 정서가 오징어게임에서도 느껴짐은 흥미롭다. 이처럼 오늘날 일본 사회의 병리성을 다루는 데데디디와 한국 사회의 병리성을 다루는 오징어게임의 각각 요소를 나열할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썩 관심이 가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두 작품의 컨셉에 집중하겠다. 오징어게임에서 잔혹한 학살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는 바다 한가운데의 어느 섬이라는 정보만으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게임 장소를 찾는 황준호는 수많은 섬들을 오갈 수밖에 없다.
바다 한가운데의 어느 섬이란 수많은 바닷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바닷물이 그 어떠한 물리적 장소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섬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공간이 가짜임을 담보한다. 일본 최초로 로케이션 촬영을 한 극 영화인 (스틸로만 접한 작품임을 밝힌다...) <오노가쓰미>는 분명 실재하는 바다를 화면에 그리는 작품이다. 당대의 연극을 그대로 옮긴 수준에 불과한 일본 신파극의 연출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그저 바다라는 정경이 연극무대라는 거짓된 공간을 보증하고 있음에 그칠 뿐이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시대의 풍경을 재현하기 위한 카메론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류층과 하류층을 실은 19세기의 정점 타이타닉호를 바닷속으로 침몰시켜 당대 사회상을 담아내고 마는 결말을 낸 사회의 축소화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듯이 그 공간은 바다라는 좌표를 알 수 없는 장소에 철저히 유리된 공간이다. 오징어게임의 촬영지는 인천 옹진군에 위치한 선갑도라는 섬이나, 섬은 작품 내에서는 태연히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무대인 안개 낀 가상의 도시 무진으로 변형돼 제시된다. 황동혁이 <도가니>에서 무진이라는 지역을 등장시킨 뒤, 그 공간을 통해 원작 소설의 모티브가 된 끔찍한 아동 학대 사건을 폭로하였듯 오징어게임에서도 현실의 문제는 바다라는 좌표를 알 수 없는 허상 위에 놓인 가상의 섬을 통해서야 비로소 폭로되고 재현된다.
그 상황이 비정상적임을 파악하는 것은 황동혁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남동 사저에서의 시민 간의 대치는 오징어 게임에서의 O/X 투표를 연상시키게 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런 사회 상황을 특수한 화면에 투영함으로써 이뤄진다. 도박중독자 성기훈이 사는 세상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병폐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시즌1의 주인공 성기훈은 스스로 자본주의적 병폐를 발견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오징어게임에서 실질적으로 그려지는 적자생존의 게임이란 현실 사회의 축소형으로서의 살인 게임뿐이다. '서울대'라는 단어가 시즌1에서 시도 때도 없이 언급되는 것처럼 어쩌면 입시 전쟁에서 승리했음이 강조되는 조상우가 (최근 영화 중에는 <서브스탠스>의 실패가 그랬듯이 결국 이해 대상에 잡아먹힌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자본주의 세계의 게임에서 이미 한번 승리했던 인물로서 최소한 그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이다. 성기훈은 조상우가 그러하였듯 적자생존 게임에서의 최종 우승을 거두고 난 뒤에나 자본주의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세계 내에서 황준호나 성기훈이 그러하듯 병폐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호수 위에 배를 띄우거나 어딘가에 이 모든 것을 투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데데디디에서 카도네와 친구들이 사회의 이상함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은 친구 키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절명했다는 tv 속 뉴스에서나 가능하다. 이상함의 인식이란 지하철에서의 어느 광인의 등장을 필요로 하거나, 오란의 오빠인 히로시가 말하듯 수많은 인터넷의 바보들이 떠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각형 화면을 요구한다. 파트1의 결말에서 세계의 종말이 선언될 때는 떨어지는 수많은 외계인을 반드시 시민들의 눈에 현현시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떤 대사건 이후로의 일본 사회 전반이 철저히 잘못됐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데데디디의 일본 사회의 병리성을 드러내는 기본적인 컨셉은 매우 이상하다. 이상한 컨셉이란 지극히 평범한 도쿄 분지의 하늘에 거대한 침략자의 모함을 띄우는 것이다. 공중에 띄운 구조물을 통해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데이비드 핀처가 <더 킬러>의 하늘에 수많은 비행기를 제시함으로써 세계화의 맹동적 구조를 폭로하고 조소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때 두 작품은 물체의 이동에 대해 차이를 가진다. 더 킬러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파리와 시카고에서 발견되는 수직적 신분 질서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킬러, 갑에서 을로 향하게 되는 킬러의 처지 변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웃듯이 하늘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비행기. 더 킬러에서 비행기는 모든 것의 꼭대기에 위치한 객체로 모든 수직적 질서 위에 놓여있으면서도 총 6막으로 구성된 세계를 총망라하는 수평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반면 데데디디의 모함이란 도쿄 상공에 멈춰있다. 모함은 도쿄 상공에 떠있는 존재이나 철저하게 멈춰있는 존재로서 어떠한 수평적 질서도 형성하지 못한다. 데데디디에서 공중에 떠있는 모함이란 도쿄에 철저히 종속돼 일본 사회의 병리성만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 더 킬러의 비행기에 대한 더 자세한 서술은 일전에 작성한 바가 있다. https://brunch.co.kr/@pollination/32)
애당초 데데디디의 주된 무대가 일본 도쿄와 작은 항구 마을이 전부라는 걸 생각해 보았을 때, 모함에 더 많은 역할을 제시하는 일은 그다지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더 킬러의 세련된 비행기의 제시와 달리 본작의 모함의 제시가 그 자체로 얼마나 많은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것은 수많은 정치 관념과 각종 병폐가 달라붙은 거대하고 육중한 폐허 쟁반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된다. 오란의 평행세계에 대한 진실이 항구 도시에 다다라서야 드러나고 모함이 폭발하기 직전에 전자파로 인해 항구 도시에서 도쿄로의 모든 통신망이 끊긴다는 걸 생각해보자. 물론 침략자 오바는 도쿄에서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도쿄라는 공간을 벗어나서야 그는 진실을 토로해낼 수 있다. 모함이 도쿄에 구속된 관념체라면 동시에 도쿄에 사는 이들에게 사회를 극복함은 곧 모함의 인력을 극복하는 일과도 같다.
3.
누가 보더라도 데데디디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를 경유하는 작품이다. 이런 요소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나름 재밌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상징물을 하나하나 읊는 것만큼이나 진부하고 무모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본인은 이 글을 이 영화의 주요 컨셉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해왔다. 이 글에는 한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두 개의 작품을 하나인 것마냥 자연스레 엮어서 본 글을 서술해왔으나 확실히 데데디디 파트1과 파트2는 개별적인 영화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두 영화로 나누어 개봉됐음은 장장 12권이나 되는 원작 만화를 스크린에 최대한 옮겨내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두 작품이 서로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서 완성되는 하나의 영화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파트1에서는 카도네와 오란의 평행세계가 단락적으로 제시된다. 침략자의 하늘을 나는 도구는 하늘을 나는 도구라고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나무 헬리콥터'라고 부르는 게 빠를 터이다. 평행세계의 이야기는 누가 보아도 도라에몽의 내용을 비튼 것임을 알 수 있는 가상의 만화 '이소베양'을 토대로 하는데, 여기서 카도네와 오란은 만화 속 이야기와는 달리 비밀도구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평행세계에서 카도네는 이소베양에서 도라에몽에서는 노진구였을 여주인공이 비밀도구를 바보 같이 쓰는 모습을 한심하게 여기다가 자신만의 정의를 사회에 관철하기 위해 침략자의 도구를 악용하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카도네가 건물 아래로 몸을 내던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완결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본래 세계와 평행세계와의 관계는 파트2에 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그런 한편 파트2에서는 평행세계에서의 카도네와 비슷한 사고를 행하는 인물이 발견된다.
유일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집단의 지도자이나 작품 내에서 줄곧 부정적이게 그려져 온 코히루이마키라는 인물이 파트1의 후반부에서 이제야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며 지하철에서 중얼거리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는 파트2에서나 파트1에서나 부정적 순간을 예언해온 사람이다. 그런 공통점이 있음에도 코히루이마키는 파트1과 파트2로 나뉜 영화에서 가장 극명한 캐릭터 성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 파트 1에서의 코히루이마키는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에 그칠 뿐이다. 그런 코히루이마키는 파트2에서는 과격 우경 집단의 간부로 등장한다.
유명 저널리스트를 포섭하고 방송국을 점거한 청년공투회의는 도쿄 시민들에게 '진실'을 말하겠다며 메시지를 송출한다. 코히루이마키는 음모론자가 된 경우가 그러하듯 8.31 사건 이후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안위를 찾아갔음을 말하며 현재의 안일한 일본 사회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리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우리는 새로운 일본의 조화라고. 초장에서 다뤘듯 8.31이라는 사건 자체가 몇 가지 실제의 대사건을 함의할 수 있는 사건임을 고려했을 때, 이것은 현 일본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혁명 선언이다.
본격적인 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코히루이마키가 미국의 cia 요원들을 심판하는 장면은 1에서의 결론이 그러하듯 현 세태를 극복하기 위한 작품 내 유일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실로 파격적이고 진취적인 성과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어딘가 미심쩍다. 그는 우연히 얻은 침략자의 도구로 (이 역시 '투명 망토'라고 서술하는 게 차라리 빠를 것이다.) 총을 든 cia 요원들을 가볍게 제압했다. 이 사실은 파트1의 평행세계 이야기와 비슷하다. 청공투의 혁명적인 미국에 대한 심판도, 미래에 대한 예지도 기실 침략자의 도구에 의존한 행위이다. 스스로를 정의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던 평행세계의 외계 조사원의 말대로 추락한 카도네처럼 "네 정의는 네 안에서만 성립해."라고 쏘아붙이던 코히루이마키 역시 모함에서 떨어져 패배하고 만다.
이 작품에서 추락이라는 이미지는 그들 자신만의 정의가 실패했음을 알리는 패배 선언이다. 특정한 예시를 드는 것조차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락의 이미지란 패배의 표현으로 많이 쓰여온 직관적인 표현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으로는 <업>에서 찰스 먼츠가 패배하는 장면이 있다. 또 <인디아나 존스: 미궁의 사원>에서 사이비 종교 무리가 강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도 생각난다. 추락이라는 행위가 정의의 패배로 성립할 수 있음은 그 자체로 그들이 어딘가의 위에 놓여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순히 추락이라는 단어의 정의만을 생각해보아도 힘을 잃은 자들의 최후나 정의의 붕괴라는 맥락이 쉽게 도출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도쿄라는 병리적 공간을 절대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거대한 모함이 모두의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코히루이마키는 외계 비행도구로 자유롭게 모함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무언가에 병리성을 투영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짐작할 수 없는 인간이다. 특히 "인터넷의 사람들이 그러잖아."라며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한 파트1의 모습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 도구라는 힘을 통해서도 이뤄질 수 없는 모함의 극복은 어디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정리하자. 이 영화는 패배의 이야기다. 자신만의 정의를 집행하겠다는 평행세계의 카도네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혁명적 행위는 실패로 끝났다. 데데디디 파트2가 오바를 기어코 살려내 오란의 앞에 데려다 놓는다는 점에서 결국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로 끝남은 분명하나, 기실 세계는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모함의 폭발 이후 오바는 자위대의 구호를 끝내 받지 못한 채 잿더미로 변한 도쿄를 향해 추락한다. 본 작품 내에서 정치적 집단과 사회가 철저하게 무익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음을 보았을 때, 해당 장면이 오바가 자위대로 상징되는 현 일본 체제 질서로의 재편을 거부하는 순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으나 이로서 본작에서의 '희망'이란 개인적 차원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물론 구세계가 파괴된 뒤에 나타난 세계는 도쿄 상공의 모함이 부재하는 세계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개인적 차원에서만 성립한다는 진실은 데데디디의 세계에서 성공한 혁명이 나타날 수 없게 만든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오란의 대사가 생각나는 것처럼 항구 도시에서의 삶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육중한 구조물이 상공에서 대지를 억누르는 방식으로 표출되지는 않지만, 항구 역시 침략자의 거대한 함선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은 아니다. 마코토는 여장을 통해 귀여워지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도쿄에서나 풀 수 있다. 그곳 또한 나름대로의 규율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의 극복은 파트2의 평행세계에서 제시된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는 '시공간의 일그러짐' 속에서만 가능하다. 오란이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지나서야 카도네가 죽지 않은 새로운 시간축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극복은 도피로서만 성립한다.
모든 혁명적 시도는 좌절됐다. 두 영화를 본 모두는 파트2의 패배가 파트1의 '인류 종료 1년 전'이라는 자막 다음에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안다. 침략자의 도구에 대한 의존이라는 한계를 가짐에도 진정으로 세계를 변화시켜보려고 한 자들이 있다. SHIP과의 대면이 그러하듯 도구를 얻기 전에도 그들은 가장 진취적인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도피라는 완전한 극복 대신에, 도쿄로부터 어중간한 위치에서 '그래도 이 방향으로 계속 살아보자고.' 외치는 감동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깨달았다는 어느 한 남자가 지하철에 나타나 눈을 부라리는 일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