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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백하 Nov 21. 2024

메갈로폴리스 - 20년 뒤의 세계에서.

제국 몰락의 지점에서, <메갈로폴리스>와 <글래디에이터 2>

 사실상 코폴라의 유작이라고 해도 좋을 <메갈로폴리스>가 드디어 인터넷상에 공개됐다. 이 위대한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을까. 메갈로폴리스 속 미 제국은 거대한 위기에 놓여있다. 전 세계에 해양 제국으로서의 힘을 투사하는 거대 제국 미국은 누가 보아도 뉴욕을 변형한 듯한 영화 속 도시 '뉴 로마'에서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현실이 그러하듯 미국은 로마이며 미국은 세계의 선구자다.


 악명에 비해 영화의 난해성이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메갈로폴리스의 서사란 아인 랜드의 자유지상주의 찬양극 『파운틴헤드』의 변주일 뿐이며 그러한 서사를 취해 이 영화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파운틴헤드의 자유시장 찬양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좌표다.


 한편 뉴 로마 미국은 거대한 부패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카진스키적 회귀를 떠올리게 만드는 문명이라는 한 가지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로마 시대 인물 카이사르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건축가 카이사르는 현실에 안주해 썩어가는 저수지의 상태에 머무를 수 없는 이이고, 문명의 궁극 '메갈로폴리스'를 향한 자신의 위대한 도시 계획을 계속해 밀어나간다. 수많은 체제의 악인들은 그를 위협해 온다.


 폐기돼 방치된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이라는 파괴된 이념의 잔해가 구시대를 덮쳐오고 뉴로마는 '정상화'된다. 소비에트가 죽은 세계에서 탐욕스러운 반동론자들은 대중을 현혹해 문명의 궁극에 대한 방해 공작을 펼치고자 한다. 여기에서 대중이 상류층의 화려함과는 지극히 대비되는 초라한 존재이자 선동의 대상으로 묘사됨은 2024년 트럼프의 거대한 리버럴 세계에 대한 공격이 할리우드의 사람들에게 비치는 것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파괴의 시간 이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콜로세움이라는 공간을 재소환해 미국을 로마로 비유하는 지극히 노골적인 방법을 취해 처녀의 경매를 깨뜨릴 때, 성조기와 남부연합기는 분노한 반지성적 대중의 상징 기표로서 아무런 맥락 없이 스크린 속을 누비며 제국의 몰락을 알리게 된다.


 가지의 끝을 향해가는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 제국의 낙후와 몰락은 영화 내에서 곧 문명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막기 위해 시간은 멈추어 문명의 궁극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해양 제국의 몰락은 리들리 스콧의 과거 자신의 히트작을 재소환한 신작 영화 <글레디에이터 2>에서도 주요하게 묘사된다. 로마는 그들의 배로 순박한 아프리카의 '미개인'들을 불태우며 등장하 그런 로마의 상류층은 부패해 있다. 매우 진부한 소리 같지만 영화 속 쇠락해 가는 로마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해양 패권을 구사 중인 현시대의 해양 제국 미국의 정치적 혼란이 투사된 이미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고결한 소망으로 묘사되는 원로원의 통치 '로마의 꿈'은 과거 압도적인 승리를 이뤄냈으나 9.11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사건을 거쳐 2021년 美의회 폭동 사건 등 민주주의의 위기라 주류 미디어에 의해 평가되는 사건들로 가득해진 미국이 민주적 질서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그 땅의 처절한 목소리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콧은 그 지점을 돌파하는 어느 방안조차 제시하지 않고 <킹덤 오브 헤븐>의 보두엥 4세와 살라딘의 만남을 자체 표절하는 것으로 영화의 막을 내린다. 킹덤 오브 헤븐과 글래디에이터 2의 유사한 대규모 출정씬은 어떠한 종류의 갈등을 일단락시킨다는 점에서 같지만 글래디에이터 2의 경우 그것이 영화의 말미에 배치돼 추후의 이야기가 작중에서 봉쇄된다는 점이 다르다. 두 집단의 강렬한 격돌은 루비콘 강을 넘어서지 못한 채 이제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주인공의 힘없는 연설로 환원될 뿐이다. 텅 빈 콜로세움에서 홀로 무릎 꿇고 아버지 막시무스에게 이 난관을 타개할 방안을 알려달라며 읊조리는 루시우스의 모습은 그 선택 자체가 사실 아무런 뜻 없는 일시적 도피 상태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다. 이와 다르게 메갈로폴리스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면서까지 위기의 극복상을 분명히 제시하나 그럼에도 영화가 도피 내지는 둔감에 따른 너무 뒤늦은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코폴라 일생일대의 역작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늦게 도달한 듯하다. 영화의 비상업성으로 인한 힘겨운 배급 과정과 뒤이은 처참한 흥행 성적, 그로 인한 국내 수입의 불가만이 그러하지 않다. 오히려 그 지점은 어둠의 경로라는 오늘날의 방법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한 부분이다. 이 영화는 '메갈로폴리스'가 기획된 70년대 후반이나 영화 내에서 소련의 인공위성이 추락하듯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무너진 90년대에나 통할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내건 시대의 이야기로 이 영화의 내용도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영화의 제작을 상당히 미루게 된 사건인 9.11 테러가 터진 이후 적어도 이라크 전쟁 정도에서, 늦어도 2016년에는 수정되거나 폐기됐어야 할 기획이다. 메갈로폴리스는 둔감하고 낡은 시대의 이야기로서 오늘날 트럼프 현상과의 접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낡은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시드니 루멧이 유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조차 기민한 감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냉소한 것과는 많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 표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결말에서 메갈로폴리스라는 거대한 상아탑에 비행기가 꼬라박아야만 모든 게 완벽해진다는 생각만을 반복하였다.


 언제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트럼피즘이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그것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순전히 추측의 영역이나 영화 속 반동가들은 과거의 각본에도 존재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중에게 힘을!'이라는 당장의 피해를 수습해 주겠다는 하켄크로이츠 위에 선 그들의 말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피즘의 구호와도 유사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유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트럼피즘이 반동적인 인종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음 역시 명확히 할 필요는 있다. (트럼피즘은 근본적으로 앵글로색슨을 정상성으로 여기는 미국 인종주의 노골적 투사의 성격을 지닌다. 이번 2024년 대선에서 상당한 수의 유색인종들이 트럼프를 지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것은 유색인종들이 그 정상성에 동조하게 된 것에 가깝다.)


 너무 자주 인용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라스 폰 트리에 이야기를 해보겠다. 트리에 말고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한 가장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양반이 보이지 않아 인용하는 것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아예 영화 속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기록 영화가 인용되며, 반동주의자들의 말로가 과거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최후와 비슷하게 그려지는 순간 나는 <살인마 잭의 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살잭집에서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기록 영화 인용이란 궁극적인 '예술'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메갈로폴리스가 보여주는 탐욕스러운 성격의 악인들과는 다르다. 그 지점은 위선적인 전후 유럽의 체제에 대한 공격으로 작용하며 동시에 트리에의 '나 지옥 갈 거다 평론가 영미 유럽 놈들아'하는 터무니없는 도전의 결말과 결부돼 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영화는 모두 삼분할의 화면을 취한다. 메갈로폴리스가 제때 나와야 했을 시기에 나오고 유일하게 세계에 도전을 하는 반동의 영화가의 작품 살잭집이 2018년에 나온 세상을 생각해 보자. 굉장히 깔끔한 그림이 아닌가?


 시간 정지는 세계 몰락의 정지로서 시체 부패 방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메갈늄은 인간의 신체를 회복시키는 기적을 선보이며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제시한다. 얼굴을 갈아버리고 잭으로 깨뜨리고 사냥을 자행해도 오히려 그들의 공격이 우리를 단단하게 한다는 코폴라의 자신감일런지. 난 그냥 늦은 기획이라고 생각하는 거지만. 메갈로폴리스의 세계에는 죽음이 존재하나 그 죽음은 잭이 아름답다고 찬양했던 시체의 부패로 이어지지 않는다. 죽음은 몰락과 부패의 예술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낳고 시체는 냉동고 속에서 손상 없이 영원한 상태에 놓인다. 하지만 그런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 일련의 기적들 또한 냉동 피자들이 잔뜩 있는 냉동고에 처박혀 어느 예술가라는 적(敵)의 도구적 활용으로 전락하는 모습 역시 상상됨은 무엇일까?


 지금 단계에서 확실히 메갈로폴리스는 너무나도 진부한 이야기이고 코폴라 특유의 B급 정서를 제하면 그 자체로는 딱히 고평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아예 다른 부분에 있다. 메갈로폴리스 속 세계는 휴대폰의 존재를 비롯한 정보 매체가 실종돼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그러하듯 관객을 향해 거울마냥 배치된 수많은 유리창에 야유받는 시장의 행렬이 반사돼 묘사되는 장면과 정보가 화면 위에 중첩돼 묘사되는 초반의 장면이 그렇듯 정보 매체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세계에서 오늘날의 정보 체계 자체가 붕괴되어 있지는 않다. 나는 컴퓨터와 휴대폰을 형성하는 사각형 틀을 영화의 혼란한 영상 감각처럼 해체시킨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냥 딱 거기까지다. 코폴라는 이것을 과거의 이야기로 돌릴 뿐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해내지 못한다. 메갈로폴리스가 비교적 신세대인 인터넷 세계라는 방법으로 상술한 장면들처럼 극장이라는 틀을 벗어나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배급됐음에서 나는 재미를 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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