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영화에서 '계시'가 표현되는 방식
연상호의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같은 모티브가 발견된다. '서울'이 아닌 향토적이거나 외곽적인 지역의 풍경, 결손된 가정 등의 이유로 어린 시절이 불우한 인물, 그리고 종교적 소재와 재개발 현장, 한국 사회를 숨막히는 지옥으로 그려면서도 장르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까지.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계시록>은 어떠한 종류의 맹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영화 <사이비>와 그리고 드라마 <지옥>이 그러하듯 주제적 측면에서도 이전의 이야기를 그저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 이렇듯 거의 대부분의 연상호 영화는 공통된 지점을 공유하고는 한다. 계속하여 반복되는 주제/소재적 측면에서 나는 연상호의 창의력의 한계가 아닌가라는 비판적인 지점을 떠올리게 된다마는 또 한편으로는 연상호가 먼 훗날 동일한 소재를 계속해 반복해온 한 장르 영화감독으로서 작은 회고전을 열 기회를 제공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역시 하게 된다.
연상호가 비슷한 소재를 끊임없이 차용하는 것만큼이나, 재료를 나타내는 방식 역시 매우 반복적이다. 아마도 연상호의 영화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적 요소로 작용하는 부분일 텐데, 연상호 영화에서 인물의 어떠한 행동의 기원이 되는 순간이란 '계시'를 받는 종교적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 계시 간의 간극은 대부분 허술하거나 우연에 기대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물론 <부산행>이 끝없는 성장으로서의 오래된 상징인 기차에 좀비 떼가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맹목성을 담아내는 것처럼 연상호의 모든 영화에 단순하면서도 연상호의 비판자들조차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연출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소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사이비>에서 주인공이 결국 광신에 매달리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현재상이 제시됨은 그리 거부감을 가질 만한 영역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넘어 <서울역>의 이야기를 서울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서 끝낼 때, (지옥이라는 오해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키워드를 영상에 등장시킨 시점에서 이미 실패한 감이 있지만) 더 나아가 "너는 지옥에 간다"라고 말하는 천사의 말을 무차별적으로 공간에 전시하는 <지옥: 두 개의 문>의 설정을 가져와 맹신에 따른 묵시록의 정경을 전시하는 <지옥> 시리즈에 이르러서는 연상호 특유의 투박하고 유치한 계시의 제시는 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변칙의 순간이 발견된다. 종전의 연상호 영화의 이미지와 다르게 깔끔한 계시록의 이미지는 발견되는 변칙적 순간이 총괄 프로덕션으로 참여한 알폰소 쿠아론의 개입에 따른 결과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쿠아론의 색깔이 가장 느껴지는 장면으로 지적되는 장면은 <계시록>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5분가량의 롱테이크씬인 듯하다. 하지만 연상호는 뜬금없고 과시적인 롱테이크 씬을 이전에 영화에 종종 넣고는 했다. 물론 모든 연상호의 롱테이크가 우민호의 <남산의 부장들>의 대체 왜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극히 과시적이기만 10.26사건 롱테이크씬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반도>에서나 <지옥> 시즌2 2화의 액션씬이나 연상호 역시 여느 한국 영화 감독만큼이나 롱테이크에 대한 어떠한 과시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쿠아론의 개입이 들어간 결과물이라지만 해당 장면이 연상호 이전작에서도 보이는 어떤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의 소재가 나타나는 방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계시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계시록에서 성민찬 목사에 대한 교수의 평가인 '연관성이 없는 관계 사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전형적인 아포페니아'는 연상호가 작품에서 징조를 표현하는 방식과 상통한다. 비록 지옥의 그 노골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성민찬이 권양래를 살해하려고 시도하기 직전, 성민찬의 앞에 예수 얼굴의 모양을 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 성민찬이 요양원에 누워있는 권양래를 살해하려는 장면에서는 천사 모양을 한 구름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이현희 형사는 권양래의 과거 범죄로 인한 피해자이자 자살한 여동생의 형상을 한 귀신의 원망을 들으며 살아간다. 이때 귀신의 형상이란 직접적으로 화면에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방식은 관객이 '굳이 이렇게 까지 보여줘야...'라는 대답을 하게 만든다.
한편 <계시록>에서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관객들이 오독을 하게끔 유도하는 부분이 발견된다. 성민찬은 권양래가 자신의 자식을 납치했다고 착각한 채 그를 미행한다. 미행 끝에 권양래가 차에 탄 성민찬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권양래와 성민찬 사이에 소통이 소통으로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자동차 창문이라는 사물이 제시된다. 자동차 내부에서 권양래를 바라보던 쇼트는 성민찬의 휴대폰 잠금화면인 가족 사진이 전시되는 쇼트로 전환된다. 이때 이 쇼트는 권양래가 자동차 내부를 응시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영화가 관객의 오독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부분으로 관객은 그 순간 목사의 입장에서 <계시록>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게 된다. 이런 창을 경유하는 오독은 장면 ㉠에 이르러서는 한 인물의 시점과 관객의 시점을 통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창문 너머 나타난 '천사'를 보고 움직이는 성민찬의 조형을 제시하는 객관화된 방식을 통해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이어 조사실/교도소 면회장에서 성민찬이 <지옥>에서 정진수가 그러했듯 창 너머의 어떠한 상징으로 스스로 체화돼 버릴 때, 이연희 형사는 그제야 비로소 광신에 대한 경계를 부여받게 된다. 창이 나타나는 징조의 순간은 경계 대상 A와의 합일 - 객관 - A를 경계하는 이로서의 합일의 태도로 진화한다. <창>에서 군의 부조리가 그려지고 폭력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게 하는 장소인 생활관은 말 그대로 창(窓)이 없는 공간이다. 창이 없는 공간에서 폭력은 되풀이되고 강화된다. 반면 계시록에서 창은 작중 인물의 오인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얄팍해 보이기도 하지만) 관객이 불합리함에 대한 구조를 파악하게 만든다.
"너는 지옥에 간다..."라고 직접적으로 '고지'하는 방법으로나 사람들의 맹신을 표현하던 연상호의 <지옥>에서 고지란 기본적으로 작중 인물에게 내려지는 비합리와 사고(事故)이며 맹신의 계시로도 작용한다. 그러나 시리즈 내내 강조되는 인터넷 매체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장면 ㉠만이 생각나게 만드는 연출로 가득한 지옥과 달리, 계시록에 이르러서 고지는 세계의 비합리함과 병리성이 이미 일상 속에 체화돼 있기에, 그것을 투박한 방법으로만 관객에게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연상호의 자의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대사건 이후의 병리적인 사회상 묘사를 하늘 위에 비행선을 띄운다는 단순한 방법 하나만으로 해결해 버린 <데드데드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1>에서 나는 이 작품이 연상호 세계와 비슷한 방법론이구나, 혹여나 연상호 작품이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면 확실히 이런 느낌이겠구나라는 인상을 받는다. 결국 맹신으로부터 탈피하자는 이야기가 <지옥>에서 조직 '소도'의 일원들이 늘 "고지는 우연한 사고일 뿐입니다."라고 매 순간 발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강박적이고 지극히 설교적인 (달리 말해 일차원적이고 사유가 얕은) 장면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본 연상호의 문법을 다시금 단점까지도 계시록은 재확인한다. 이는 <창>이 '인권' 만화집을 자칭하고 있는 《사이시옷》에서 발간된 동명의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너무나도 인권 만화적인 세계에 기초하는 연상호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계시록은 맹신의 굴레를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종류의 계시가 화면에 제시될 수밖에 없다는 연상호의 의식을 드러내는 작업으로서 눈여겨볼 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