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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Aug 11. 2018

황현산, 어른의 언어로 말했던 사람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에 나오는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안다. 사랑하는 작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가 쓴 책을 서가에서 꺼내 아침저녁으로 읽는 일이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고 자기 안에 여전히 머무를 수 있도록 터지는 울음을 참으면서 밑줄을 덧대는 일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 2018)


읽기는 쓰기를 동반한다. 읽기는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나의 기억을 다시 쓰는 것이고, 정신을 다시 쓰는 것이고, 영혼을 다시 쓰는 것이다. 읽기를 거쳐 우리는 이제 육체를 잃은 그를 영영 동반할 수 있다. 이것이 독자의 애도다.


황현산 선생이 엊그제 세상을 떴다. 프랑스시의 번역자로서 우리말에 풍부한 상징성을 더했고, 문학평론가로서 현대시의 과격과 모험을 순전히 옹호했다. 무엇보다 선생은 덧없는 일상에 단단한 의미를 불어넣어 준 어른이었다.


“어른의 언어로 말하라는 것은 수구 보수들의 언어로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어를 나열하는 식이 아닌 정확한 문장으로 논리에 맞게, 응석부리지 않고 주눅 들지 말고, 과장하지 말고 축소하지도 말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어른이란 수구의 언어가 아니라 정확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정확하다는 건 세계의 “어둠 속에서 불을 얻어오는” 법을,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세상에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밝은 곳에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다 아는 가능성이고, 어둠 속에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린, 열릴 길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비로움이 아직 남아 있고, 누군가는 탐구의 피를 쏟아 희미하게 빛나는 구슬을 만들 줄 안다는 것.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명상과 숙고로부터 얻어진 가능성의 언어, 즉 희망의 언어로 말할 줄 알 때 노인은 꼰대가 아니라 어른이 된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밤의 선생’이 된다. 


아프고 슬프다. 우리는 이토록 정확한 언어를 더는 들을 수 없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한테서 울음을 삼키는 법 또한 배웠다. 상실이 슬픈 까닭은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전혀 허무하지 않다. 언젠가 찾아올 필멸의 운명으로부터 우리는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아름다움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선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글로써 엄연한 이 사실을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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