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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Aug 18. 2018

쉼보르스카는 책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 최성은 옮김(봄날의 책, 2018)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 최성은 옮김(봄날의 책, 2018)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최성은 옮김, 봄날의 책, 2018)를 하룻밤 만에 완독했다. 452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걸림돌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독서록을 읽는 것은 항상 흥분과 질투를 동반한다. ‘그/그녀는 어떻게 읽었을까’ 하는 설렘이 핏속에 흥분을 불어넣고, ‘이렇게까지 읽을 수 있구나’ 하는 기분이 머릿속에 질투를 일으킨다.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쓴다. 내가 이미 읽은 책을 좇으면서 비관하는 법(“나는 바보였어! 어떻게 이런 걸 모를 수 있지!”)과 내가 아직 읽지 않는 책을 살피면서 절망하는 법(“나는 엉터리야! 어떻게 이런 책도 안 읽을 수 있지!”)이다. 


어쩌면 편집자란 이러한 비관과 절망을 메우려고 ‘이미 읽었지만 아직 낯선 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출판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몇 책은 ‘미래의 출판목록’에 올려두었다.


이 책은 특이한 책이다. ‘비필독도서’를 다룬다. 이 책에서 쉼보르스카는 위대한 시인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로, 아마추어로, 무언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서평은 단 하나도 없다. 책을 전적으로 전달하거나 의의를 정리하기보다는 문장에 집착하고,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딴죽을 불쑥 걸고, 냉혹한 비아냥을 서슴지 않는다. 스르르, 후루룩, 듬성등성, 눈에 띄는 대로 넘기면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자유롭게”.  


하지만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서른다섯 해 동안 쓰인 이 글들에는 ‘발랄한 기품’이 있다. 문체는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운데, 달리다 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거대한 빛을 발하면서 눈길을 붙잡아 둔다.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를 읽고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고 말하는 부분은 한 번도 주목해 본 일이 없기에 무척 뼈아프다. 문학의 출발점은 인습이나 권력이 남긴 억압과 상처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역사가 하는 일이고, 문학의 임무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쉼보르스카는 『춘향 이야기』에 춘향의 깨어진 발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을 문학의 승리로 본다.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즉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니까 말이다. 동화의 힘을 믿는 아름답고 웅숭깊은 읽기다. (쉼보르스카가 인용한 몇몇 구절은 도대체 무엇을 번역한 것일까 궁금해 찾아보았다. “만 개의 버드나무 가지가 떠나는 바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는 「열녀춘향수절가」에 “버들가지 천만 갈래인들 가는 춘풍(春風) 어이 하며”(『춘향전』, 송성욱 풀어 옮김, 민음사, 2004)로 되어 있었다.)


『100편의 멜로드라마』라는 책을 읽은 후 적어 둔 글도 잊을 수 없다. 대부분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이 영화들에 대한 책을 본 후 쉼보르스카는 말한다. 


나는 궁극적으로 멜로드라마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 너무나도 좋아한다. 특히 오래된 영화일수록 더 좋다. (중략) 나는 그저 오래전에 삶을 마감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다. 비록 그들은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그들의 아주 작은 흔적들을 말이다. 그들은 왈츠를 추고,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 들꽃이 흩뿌려져 있는 푸른 초원을 뛰어다닌다……. 


격렬하고 과장되고 허무한 사랑 이야기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보는 사람만이 시인이 된다. 마침내 위대함을 얻는다. 그래서 쉼보르스카는 함부로 세상을 해탈하는 자들을 미워한 듯하다. 『모두를 위한 하타 요가』를 읽은 후, 이렇게 말한다. 


인도의 고행자들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나’를 온전히 떨쳐 버리는 사람만이 완벽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과연 이런 경지에 다다라는 게 나에게 꼭 절실한 일일까. (중략) 인간으로서 고유한 성향을 굳건하게 간직한 채 주위의 모든 난관을 헤치고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는 건, 죽고 나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릴렉스 ― 101개의 조언』을 읽고는 이렇게 쓴다. 


휴식과 릴렉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휴식을 취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한다. 잠자고 싶으면 자고, 숲길을 거닐고 싶으면 숲속을 걸어 다니고, 조이스를 읽고 싶으면 조이스를 읽는다. 하지만 릴렉스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런 식의 자유의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직장의 업무나 그 밖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모든 여유시간은 체조나 마사지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체조나 마사지를 시작하기 전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고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어떤 애드리브도 허용되지 않는다. 심리 상태 또한 마사지를 위해 완벽하게 열린 자세를 만들어야 한다. 


해탈이나 릴렉스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휴식할 수 없게 된다. ‘쉼’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고 강박에 사로잡혀 결국에는 요가 비즈니스나 릴렉스 산업의 노예가 된다. 인생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일상에 이미 존재한다. 휴식 역시 마찬가지다. 낮잠과 산책과 독서와 음악……. 우리는 탈출 욕구에 결박되어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판타지에 빠져든다. 그 결과,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된다.


이 책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 끈질긴 옹호가 빛을 뿜는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스리 테너의 사생활』 같은 책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나 쉼보르스카의 읽기를 보라. 


어느 나라의 공주와 같이 찍은 사진부터 샴페인 파티에서 억만장자와 함께 있는 사진,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나는 애인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걸 가리켜 저자는 ‘사생활’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삶을 포장하는 얇은 금박지에 불과하다. 막상 그 껍질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잿빛의 딱딱한 호두, 바꿔 말하면 단조롭고 힘들고 끈질긴 일상이 숨어 있다. (중략) 매일 되풀이되는 의무적인 발성과 호흡 훈련, 반주자와의 연습, 파트너 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리허설, 매니저들과의 회의, 수차례 반복되는 녹음은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벌써 지겨워진다. 


‘호두’를 존중하지 않고 ‘금박지’만을 바라보는 모든 이야기는 비록 사실일지라도 진실은 아니다. 껍데기는 아무리 화려해도 껌이 아니다. 


예술가는 ‘호두’를 통해 단련된 힘으로, 일상을 비범하게 만든다. 쉼보르스카에 따르면, 노래에 “영혼과 심장 그리고 다른 장기들까지 모두 쏟아”붓지 않는 방식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억지로 쥐어짜내지 않”는 방식으로, 즉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엘라」)는 방식으로 노래를 할 줄 안다. 너무나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된 악기였기에, 모든 노래가 느리게 시를 읊는 듯 편안히 들렸던 엘라 피츠제럴드처럼 말이다. “텍스트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노래에 “항상 어린 소녀의 순수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을 수 있다. 자신의 시를 연상시키는 엘라의 목소리를 위해 시인은 시를 한 편 바쳐서, 무엇이 진정한 예술인지를 영원히 증명한다.


신께 기도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행복한 백인 소녀로 
자신을 만들어 달라고.
만약 모든 걸 바꾸기에 너무 늦었다면,
주님, 제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좀 봐 주세요.
그리고 절반만이라도 제게서 덜어가 주세요.
하지만 자애로운 신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단지 엘라의 심장에 손을 얹고,
그녀의 목구멍을 들여다보고는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약 모든 것이 끝나거든
내게로 와서 날 기쁘게 해 주렴,
내 검은 위안, 노래하는 그루터기야. 


이 책에는 짧은 글로는 담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좋은 독서록의 특징이기도 하다. 실을 보내 이들을 하나로 꿰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쉼보르스카의 열망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상의 평화와 소중함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그녀는 파괴된 일상에 분노할 줄 알았고, 패배한 영혼의 고통을 연민했으며, ‘호두’를 통해 단련된 언어로 상처를 치유할 줄 알았다. 찰스 디킨스처럼, “인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자유를 열망했다. 이 책이 ‘비필독도서’에 대한 안내서가 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체의 집단성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열망했다. ‘필독’이라는 말에 깃든 권위와 억압을 싫어했다. 따라서 그녀의 독서론은 ‘자유의 독서론’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중략) 책을 갖고 노는 호모 루덴스는 자유롭다. 주어진 자유를 가능한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호기심에 부합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적인 책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시시한 책들도 얼마든지 고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거기서도 뭔가를 배우게 된다. 어떤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않아도 되고, 또 원한다면 어떤 책은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도 있고, 어떤 대목에서는 평생 기억할 문장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테뉴가 주장한 것처럼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 준다. 


자신의 일상을 내주어 완전히 자유롭게 책을 읽고, 때때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책에 대해 글을 쓰는 삶, 이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흥분하고 질투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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