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문학동네, 2018)를 읽고
이수정의 첫 시집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문학동네, 2018)를 읽었습니다. 등단 열일곱 해 만에 나온 시집입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존재의 심연에서 “고운 눈처럼” 내리는 죽음을 받아 안는 “눈먼 가오리”(「심해에 내리는 눈」) 같은 것입니다. 삶의 표면에서 잊힌 것들, 사라진 것들, 가라앉은 것들을 ‘받아주겠다’고 말하는 행위죠. 허망하거나 슬픈 건 아닙니다.
“밤을 가로지르며 기꺼이 사라지는/ 꼬리”인 별동별이 보여주듯, 떨어지는 것에는 “심장”(「별의 심장이었던」)이 담겨 있으니까요. 진정으로 “재밌는 것”들은, “홀딱 빠지고 푹푹 빠져”드는 것들은 “무거우니까”(「재밌는 것은 무거우니까」)요. 이것을 ‘무게의 시학’이라고 할까요.
누구나 무게를 재밌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무나 “눈먼 가오리”가 되어 “심장”을 쥘 수는 없죠.
“순백의 중심”에 선 이만이, “투명한 정신에 닿을 때까지 들러붙은 때를 때어낸” 존재만이, “숨겨진 그늘을 내놓”은 “목소리”(「연필」)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연필이란, 자신의 목숨을 졸여서 언어의 “검은 광맥”을 드러낸 천사입니다. 한 글자 타자의 존재를 기억할 때마다, 생명을 조금씩 잃어 갑니다. 그리하여 시인한테 시 쓰기는 목숨을 내주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숭고한 기억이 됩니다.
무엇이 시인을 여기까지 이끄는 것일까요. “한 생애를/ 지느러미에 맡기고 살던 것들이/ 수평선 너머로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죠. 삶에 자유를 돌려주려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람과 나란히 걷는 일이네요. “저물녘이면 바람이 손을 핥아주었다 나는 바람의 목줄을 풀어 주었고 나란히 산책하였다.”(「바람의 목줄을 풀어주다」) 날아오르려고 가라앉는 겁니다. 저는 이 시집과 함께 비로소 ‘무거운 자유’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기획회의》 제469호 신간동향 토크에서 했던 말을 조금 보충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