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 독서를 말하다
교양인은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책벌레나 유식한 사람,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배우지 못한 학자도 존재합니다. 교양인은 책을 읽은 후에 변화하는 사람입니다.
“휴머니즘이 결국 그 무엇으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겁니까?”
[독일의 작가] 알프레트 안더시가 묻자, 중산층 휴머니즘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스승의 아들이자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대답했습니다.
“휴머니즘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담은 책을 그저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 다시 말해 책을 읽고 난 뒤가 읽기 전과 다른 자만을 지켜 줍니다.”
지식이 그저 정보들로 이루어진 더미나 시간 때우기의 수단,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확장을 이끌어내서 결국 행위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교양이 가진 뚜렷한 특징입니다. 이는 꼭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때로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교양을 쌓아 가는 사람은 시 한 편으로도 변화합니다. 이 점이 교양을 갖춘 시민과 교양의 뒤꽁무니를 좇는 속물의 차이입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문향심 옮김, 은행나무, 2018)을 읽는 데에는 하루 이상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두 편의 생각 깊은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불과 88쪽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의미는 깊고 또 넓다. 위에 인용한 글은 첫 번째 에세이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다. 교육이 대량으로 속물들을 길러내는 시대에 이 에세이는 교양이 왜 여전히 가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비에리에 따르면, 교양은 자신을 특정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어리석은 편견을 물리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흘러간 이야기를 한없이 우려먹지 않고 자신을 더 우아하게 표현하고, 더욱더 큰 관용으로 타자를 이해하며, 그리하여 누군가 자신을 도구로 부리려 할 때 자신을 지킬 줄 안다.
교양 있는 사람은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식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것들에 불같은 분노를 느낀다. 교양은 돈이나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떠한 종류의 유용성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힘러의 말은 자기 비난이다. 나치의 하수인이 된 그야말로 책을 읽고 행하지 못한 자, 책을 소비만 한 자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을 저주했을 뿐이다.
요컨대, 교양이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다듬고 매만져서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종의 ‘자기 축조술’ 같은 것이다. 교양을 쌓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지만, 비에리는 독서를 강조한다.
비에리에 따르면, 지식을 담은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릿속에서 “여러 목소리로 이루어진 합창”을 듣는다. 책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그러고 나면 “세상을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다르게 이야기하고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더 많은 연관 관계를 알아채게 된”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 조금 다른 변화가 나타난다. “문학을 읽는 것은 영혼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작품을 읽은 후에는 “같은 것을 놓고도 이전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랑과 다른 미움을 배운다.” 문학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경험을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즉 과거와는 다르게 겪을 수 있도록 우리의 감수성을 훈련시킨다.
책을 읽고 나서 삶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는 이는 교양 있는 사람이 아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독서를 통해 “자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쌓아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아의 고갱이에 도달하는 데에는 끝이라는 지점이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독서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