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절각획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은수 Aug 24. 2018

스스로 생각하고, 알려고 하라

어떻게 진실을 추구하는 교양인이 될 것인가

일러스트= 문화일보 김정훈 기자 kimjh@

“생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진실사회』에서 말한다. 바다 건너 스위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에서 화답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교양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스스로’는 누군가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대신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용기를 품고 “감히 알려고 하라”는 명령을 자신을 위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지 말고 반응하라’는 모바일 시대의 생활양식이다. 모바일 기기는, 인간을 정보를 작동시키는 프로세서로 만든다. 검색하고, ‘좋아요’를 클릭하고, 톡을 보내고,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달 때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의 일부가 된다. 정보는 사실이나 진실 여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원리상 ‘전달/비전달’의 물리량만 따질 뿐이다. ‘악의 없는 과장’이든 ‘대안적 사실’이든, ‘좋아요’만 많으면 상관없다는 식이다. 댓글조작과 같은 가짜진실이 판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책들은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우리한테 알려준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선동에 속아 넘어가지도, 자신의 편견에도 빠지지 않는 우아하고 훌륭한 삶 말이다. 진실을 추구하고 교양을 이룩하는 고상한 삶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줄리언 바지니, 『진실 사회』, 오수원 옮김(예담아카이브, 2018)

『진실사회』는 가짜 진실이 횡행하는 현대사회에서 진실이란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과 모세에서 푸코와 오스틴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둘러싼 서구적 사유의 역사 전체를 다루면서, 진실이 각종 함정에 빠질 때마다 사유가 어떻게 진실을 구원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바지니는 지구의 역사가 1만 년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을 비롯해 독단과 편견, 거짓과 오류를 진실로 포장하는 사례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9·11 테러를 미국 중앙정보부가 기획했다는 식의 음모론,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 모든 진실을 권력의 조작으로 보는 태도 역시 부정한다. 우리는 ‘더 나은 태도’로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


“진실을 확립하려면 겸손, 회의, 다른 관점에 대한 개방성, 집단적 탐구 정신, 권력에 기꺼이 맞서려는 자세, 더 나은 진실을 구축하려는 열망, 사실에 근거한 도덕을 확립하겠다는 의지와 같은 ‘인식의 미덕’이 필요하다.”


‘인식의 미덕’을 갖춘 인간이 비에리가 ‘교양인’이라고 부른 사람인 듯하다. 『교양수업』에서 비에리는 우리가 교양인이 돼야 하는 이유는 타인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인식의 미덕’을 갖춘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사람은 타인의 진실을 함부로 추종하지 않기에 “타인이 나를 이익의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페터 비에리,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 문향심 옮김(은행나무, 2018)

“교양이란, 사람이 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다. 교육은 우리한테 특정한 능력을 길러준다. 교육을 받으면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교양은 나라는 존재를 변화시키려고, “세상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려고 할 때 필요하다. 교양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 즉 고독과 고뇌 속에서 자신을 든든히 축조하는 일이다.


“비판적 의식과 회의적 경계”를 통해 우리는 기성의 진실이나 경험을 손쉽게 수용하는 대신 내적 역량을 키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건축할 수 있다. “교육은 다른 사람이 나한테 베풀어줄 수 있지만 교양은 자기 혼자 힘으로 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양은 인생의 방향을 잡는 일,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지니는 진실에 대한 태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진실은 영원하지도 권위적이지도 음모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상대적이지도 권력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총체적이지도 않다. 동시에 진실에는 이 모든 속성이 조금씩 담겨 있기도 하다. 진실은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세상을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는 모든 것엔 진실이 없다. 진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탐구의 형태를 취한다. 그런데 탐구야말로 교양의 참모습이기도 하다.


교양을 쌓는다는 것은, 과거에 또는 세계에는 지금 이곳의 삶과 다른 삶이 존재함을 앎으로써 다양성을 수용할 줄 아는 성숙성에 이른다는 뜻이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이슬람 난민을 수용하지 않거나 성적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교양인일 수 없다. 


또 “오래전 주워들은 조각난 말과 생각의 찌꺼기들만 되풀이하는 이들”, 즉 ‘꼰대’도 교양인은 아니다. 교양이 있는 이들은 독서 등을 통해 꾸준히 관심을 보충함으로써 “세상과 자신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줄 안다. “자신의 미숙함과 부실함을 인정”하고 왕년의 모습에 고착되는 대신 자신을 새로 다듬는 쪽을 택한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삶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도구화하는 일에 단호히 반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교양인은 “돈이 되면 뭐든지 하는 태도에 불같은 혐오”를 표현하고 세인의 비웃음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돈키호테적 정의를 실행한다.


『진실사회』와 『교양수업』은 이 타락한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함으로써 철학의 임무를 멋지게 수행한다.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