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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Aug 26. 2018

페터 비에리의
‘좋은 문학작품을 고르는 법’

좋은 문학은 좋은 음악을 품고 있다


[문학]책에서 어떤 감동을 받는지, 그 책이 마음에 드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주로 음악적 특성에 좌우됩니다. (중략) 책을 고르는 사람들은 책의 음색과 리듬과 멜로디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문학적 글에서는 내용이나 줄거리의 많은 부분이 형태, 즉 단어의 선택과 작풍, 속도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런 기준을 두고 작품을 선택했다면 결코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문향심 옮김, 은행나무, 2018)에 나오는 글입니다. 페터 비에리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파스칼 메르시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두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용문은 두 번째 에세이 「이해의 다양한 모습 ― 학문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에 들어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문학의 언어가 갖는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언어적 쓰레기’의 범람 속에서 문학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려 합니다. 페터 비에리는 문학에 음악이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거멀못으로 봅니다. 왜 그럴까요. 비에리의 논의를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문향심 옮김, 은행나무, 2018)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연의 힘이 지배합니다. “맹목적 인과관계”로 다가올 뿐이죠. 언어를 통해 인간은 이러한 맹목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의 차원’으로 변화시킵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들”이 됩니다. 자연현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양적인 정확함”에 기반을 두고 ‘법칙’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사회현상을 이해하려면, “원인의 언어”, 즉 “우리의 신념, 바람, 감정 등이 서로 들어맞아” “전체적 통일성”을 이룩하는 “정신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정신의 언어는 “나 또는 타인들이 어째서 특정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 기준이 되는 일상의 심리학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정신의 언어는 형이상학이 아니기 때문에, 한 정신의 언어가 다른 정신의 언어보다 우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가진 정신의 언어를 이용해서 “세계를 관찰”하면서 “다양한 관심을 기반”으로 새롭게 “세계를 창조”할 뿐입니다.


비에리에 따르면, 문학의 언어는 정신의 언어에 속합니다. 문학의 언어는 “서술[서사]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경험을 이해시키는 문장들의 연속체”입니다. 문학이,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가 다루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특정한 행동과 생각과 감정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서술되어 있지 않으면, 독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작가들은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자신의 세계로 데리고 갑니다. “희귀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어디까지나 “정확함”을 향한 열정의 결과일 뿐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샐린저가 “평범한 말을 사용해서 뛰어난 정확성에 도달하는 기법”을 보여 주었다고 비에리는 말합니다.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내 몸에 뭔가를 덮어 가려줄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정말로 뛰어내렸을지 모른다. 피 칠갑한 살덩어리가 된 내가 구경꾼들이 볼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다. 


자살을 떠올렸다가 죽지 않은 이유를 이토록 선명한 혐오로 표현했다면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죠. 요컨대, 작가는 등장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독자의 짐작에 맡겨두지 말고 하나도 빠짐없이 해명해야 합니다.


문학은 완벽하게 지적인 작업이며, 정확한 언어를 향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문학이 “겉으로 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생각의 내용을 조금도 담지 않은 그저 헛소리”일 뿐인 “쓰레기 문장들”을 혐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사고의 일치성”이 문학에서는 “사건에 투명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적절한 은유와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나타납니다. 이로써 문학은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 됩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사고적 일치성을 이루어야 하고, 사고적 분석은 경험의 정확한 묘사에 기댈 수 없을 때 공리공론으로 흐릅니다.


문학이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복합성과 중층성’입니다. 문학은 이성의 정확함이 한계에 이르는 곳까지 언어를 밀어붙입니다.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는 자리까지 인물들을 몰고 가서 정신의 심연을 드러냄으로써,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밝혀 줍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 존재인지, 표면을 덮고 있는 이성에 얼마나 자주 구멍이 뚫리는지, 감정적 정체성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힘을 갖출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오만을 무찌르고 우리를 겸손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돌려줍니다. 비에리는 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문학은 경험을 예술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세계 속에서 받은 결정적 체험을, 하지만 “여전히 투명하게 와 닿지 않는 경험”을 언어를 통해 서술함으로써 “투명하게 밝히고, 이를 통해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열정적 욕구”가 작품의 출발점입니다.


체험담이나 에세이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 지어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타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르네 지라르, 에마뉘엘 레비나스, 자크 라캉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밝혀낸 바 있습니다. 이를 ‘허구의 역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 작가는 인물을 창조하고 ‘응축’과 ‘압축’(플롯)을 통해서 그에게 “최대한 선명한 입체감”을 부여함으로써 “매우 강렬한 현재화된 경험”을 창조합니다. 이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내면세계의 한 부분에 아주 밝고 환한 조명을 비추”는 작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페터 비에리는 말합니다.


타인을 연출하는 것은 자신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전적인 글에서는 결코 달성하지 못할 투명성과 분석적 밀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문학의 언어를 말할 때 절대 빠뜨리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의 행동, 즉 줄거리는 문학이 아닙니다. 줄거리가 문학이 되려면 “어떻게 말하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보봐리 부인의 “줄거리는 통속 신문에 나올 법한 기사마냥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은 “플로베르가 연출한 단어와 문장” 덕분입니다. 플로베르는 고백합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책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책, 문체가 가진 내적 힘에 의해 스스로 존재하는, 외적인 것과는 단절된 책……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최대한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책입니다.(1852년 1월 16일,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문학이 줄거리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처럼 선명하게 표현한 말은 드뭅니다. “줄거리는 이미 다 아는데도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지, 즉 글의 형식 때문에 그 글을 읽고 싶어지는지가 우리가 문학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비에리는 말합니다. 문학작품을 놓고 스포일러 운운 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말인지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문학의 언어는 “음악적 요소”를 품으려 합니다. 


문학적인 글은 음악적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의 글에는 특정한 숨결, 특정한 리듬, 하나의 멜로디가 있습니다. 『젠틀맨 트리스트램 샌디의 삶과 견해』의 도입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아니면 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양편 모두에게 의무가 고루 나누어지므로 참으로 두 분 모두가 당신들께서 과연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나를 만드셨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죽죽 늘여놓은 바로크풍 리듬의 이 글을 베케트의 소설 『몰로이』의 스타카토 리듬과 비교해 봅시다. “나는 어머니 방에 있다. 이제 여기서 산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모른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 같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로런스 스턴과 사뮈엘 베케트의 문장 리듬은 확연히 다릅니다. 좋은 문학에는 모두 고유한 음악이 있습니다. 문학에 고유한 음악이 생기는 것은 작가는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특수한 리듬과 멜로디를 가진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비에리는 프리모 레비의 입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확증합니다.


작가는 자기가 쓴 모든 단어에 대해 왜 다른 단어가 아닌 바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문장을 문학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문학에 다른 길이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이게 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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